귀주대첩 직후 고려의 방향

통주전투로 고려군 30만이 와해되고 왕이 나주까지 도망갔다온 5년후이자, 귀주대첩이 일어나기 4년전인 현종6년(1015) 1월. 요나라 측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성을 쌓아버립니다. 그게 바로 훗날의 보주(의주).

정월

거란이 압록강에 교량을 가설한 후 다리의 좌우에 동서로 성을 쌓으므로, 아군이 장수를 시켜 쳐부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귀주대첩 그 이후

​겨울이기도 했고 압록강 근처엔 섬도 많아서 아마 이 정도 배가 필요하지는 않았겠지만.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도하하여 성을 쌓은뒤 그 성을 거점으로 지속적으로 고려에 더더욱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는데, 고려군도 거란의 공세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무시못할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계묘일. 거란군이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장군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弋) 등이 공격해 물리쳤다.
갑진일. 거란군이 다시 통주(通州)로 침공해 왔다.

계해일. 흥화진대장군(興化鎭大將軍) 정신용(鄭神勇), 별장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 양춘(楊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의 후미를 기습해 7백여 명을 죽였으나, 정신용 등 여섯 명도 전사하였다.

정묘일. 거란이 영주성(寧州城 : 지금의 평안북도 안주)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경오일. 대장군 고적여(高積餘), 장군 소충현(蘇忠玄)과 고연적(高延迪), 산원(山員) 김극(金克), 별장 광참(光參) 등이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거란군은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좌(王佐)와 녹사(錄事) 노현좌(盧玄佐)를 포로로 잡아갔다.

이렇게 소모전으로 가다가는 인력과 물력이 요나라보다 못한 고려가 지는게 명약관화, 공동전선을 펴 적의 공세를 분산시키기 위해 11월에 송나라로 곽원을 보냈지만……

​현종6년(11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치면서 거란(契丹)이 해마다 침략하는 사정을 알렸다. 마침 여진(女眞)도 거란의 침략을 받아 여러 해 동안 내조(來朝)하지 못한 사정을 호소하였지만, 송나라 황제는 거란과 이미 화친의 맹약을 맺었으므로 답변하기 난처해하였다. 이에 학사(學士) 전유연(錢惟演)이 이런 조서를 기초했다.

​“경이 말하는 바 정도(正道)를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 깊이 슬픔을 느끼노라. 하지만 이웃 나라인 거란 또한 우리와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맺은 처지니, 내가 바라는 것은 서로 화목하게 지냄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황제가 읽어보고서 “이같은 글이라면 비록 거란이 보게 되더라도 무방하다.”고 흐뭇해하며, 곽원에게 분부해 개보사(開寶寺)를 둘러보도록 하고, 몰래 관반사(館伴使)인 원외랑(員外郞) 장사덕(張師德)을 시켜 곽원을 설득하도록 했다. 장사덕이 곽원과 함께 사원에 있는 탑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수도에 있는 크고 높은 건물들은 모두 군영으로 쓰이고 있소. 폐하께서 천하를 통일하셨으나 아직도 군사를 양성하고 날마다 조련해 북방을 방비하도록 하였소. 천자께서도 이렇게 고심하시는데, 하물며 귀국은 거란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친선을 맺어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오.”

​고려사 열전 곽원

군사 보내서 견제좀 해달라니까 “친선하여 화목하게 잘 살아~” 라는 반응……….

그리고 다음해 정월 곽원이 송나라에서 돌아오기 직전 또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 이번에는 고려군 수만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현종7년

정월 경술일. 거란의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열(蕭屈烈)이 곽주(郭州 :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를 침공하자, 아군이 맞붙어 싸웠으나 수만 명의 전사자가 났으며 적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여 돌아갔다.

그렇게 패배하고 며칠뒤 곽원이 돌아와서 송나라의 그 의미없는 조서를 가져다 주는데…..

현종7년

정월 임신일. 곽원(郭元)이 송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그 편에 송나라 황제가 조서를 보냈다.

“….이웃나라 거란을 돌아보건대 그 또한 우리와 우호의 맹약을 오래 지켜 왔으니, 부디 서로 화목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라노라.”

일반적이었으면 아마 이렇게…..

솔직히 이때 현종 멘탈이 안드로메다로 안 날라간게 다행이었죠. 하지만 현종은 미치지 않았고, 강동6주를 중심으로 우주방어를 하면서 이후 계~속 요나라가 소모전으로 가다가 다행히(?) 3년뒤에 요나라측에서 대규모로 도박적인 한타공격을 시도하지만 고려의 영웅적 승리였던 귀주대첩으로 그 도박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현종10년(1019)

2월 초하루 기축일. 거란군이 귀주(龜州)를 통과하자 강감찬 등이 요격해 대패시키니 겨우 수천 명만 살아 돌아갔다.

한국 3대첩의 하나인 귀주대첩

하지만 귀주대첩이 일어난 그 해 요나라는 또다시 고려에 대한 공세를 계획합니다.

開泰 8년(1019) 

8월 경인일. 郞君 曷不呂 등을 파견, 諸部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大軍으로 편성해서 함께 高麗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요사 권 16 본기 – 

또다시 공세를 계획하는 요나라

그리고 고려도 요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러한 분위기를 탐지하게 되죠.

현종10년(1019)

8월 을미일.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이인택(李仁澤)을 거란의 동경(東京)으로 보냈다.

開泰 8년(1019)

12월 신해일. 고려왕 순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길 애걸하니 받아들였다.

-요사 권 16 본기- 

고려 현종이 상황 돌아가는거 보니 병력수는 차치하고 요나라는 또 공세를 취하려고 하고, 그런데 송나라가 공동전선을 피든가 해야지만 가망이 있을거 같은데 그럴 일은 없고, 이렇게 계~속 거란이 고려 쪽에만 공세를 집중해서 고려 경내에서 국지적이건 대규모건 전쟁을 치르다가는 전투에서 승리를 지속한다 하더라도 고려는 이후 가망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고구려가 당나라랑 싸우다가 그랬던 것 처럼)

결국에는 고려측에서 요나라의 체면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결정, 귀주대첩이 일어난지 딱 1년만에 항표를 바치고(나중에 만력제가 임진왜란 협상 중 일본에게 원했던 것 중 하나가 관백항표), 대외적으로는 고려가 요나라에게 신속(臣属)하는 것을 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됩니다.

현종11년(1020)

2월. 이 달에 이작인(李作仁)을 시켜 표문을 휴대하고 거란에 가서 번국(藩國)을 칭하면서 옛처럼 공물을 받아줄 것을 청하게 했다. 또 거란 사람 지자리(只刺里)를 돌려보내었는데, 그는 여섯 해 동안 우리에게 억류되어 있었다.

​4월 정미일. 예부상서(禮部尙書) 양진(梁稹)과 형부시랑(刑部侍郞) 한거화(韓去華)를 거란으로 보내 왕자의 책봉을 알리려 하자, 재신(宰臣) 유방(庾方) 등이 간언해 말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開泰 9년(1020)

5월 경오일. 야율자충이 고려로 부터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왕순이 표를 올려 번국이 되어 납공하기를 청하였다…. 신미일. 사신을 보내어 왕순의 죄를 사하여주고, 그 청을 윤허하였다.

-요사 권16 본기 –

9년. 야율자충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詢의 항복表를 바치니, 詢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요사 고려전-  

​그러고 나서 요나라에 사신을 자주 파견한 것과는 달리 현종12년(1021)에 한조(韓祚)를, 현종21년(1030)에 원영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한 이후 한동안 송나라에 공식적인 사신 파견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 후로는 사신이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못한 지 43년간이 된다” – 송사 고려전 –

​압록강 지역을 빼앗기고 난 뒤에 요나라의 지속적인 병력투사와 그로인한 소모전, 그리고 요나라에 대한 송나라의 미온적인 태도와 방관은, 고려로서는 송나라에서 요나라로 갈아타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고려로서는 계속해서 ‘혼자’ 요나라와 전쟁을 벌여 인력과 물력을 소모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귀주대첩 직후 현종이 빠르게 요나라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동시에 송나라와의 관계를 차차 단절시킨 선택은 당시 돌아가는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잘 살핀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 물론 공식적으로 사대를 하면서도 고려사람들의 내부 기록에는 요나라를 표현하면서 ‘중화’라는 단어를 붙이지는 않았는데(오히려 송나라에게는 붙임), 아마 고려 사람들 최후의 자존심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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