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위계승 초고계 vs 고이계

초고계 VS 고이계의 왕계조작 논쟁에 대해서 풀어볼까 합니다.

막연하게 내용을 풀어내는 것보다 고이왕 시절, 비류왕 시절의 백제 상황을 먼저 알려드린 다음에 이 논쟁에 대해 말씀드려야 더 와닿으실 것 같아서 이제서야 이 주제를 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주제에 대한 답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왕실 계보가 조작된 흔적은 있으나 진실을 알 수 있을만한 단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대한 진실을 끌어내보려는 게 후대인의 재미 아니겠습니까?+ _+
오늘 글은 저의 망상과 추측에 불과하니 가볍게만 읽어보십시오^^

2. 다시 한 번 보는 고이왕과 비류왕의 이상한 즉위 연대


이미 과거에 다 보셨지만 이 글이 처음이신 분들도 계실테니 고이왕과 비류왕의 즉위연대가 왜 이상한지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초고계vs고이계 백제왕위계승

먼저 8대 고이왕을 보겠습니다.
8대 고이왕은 4대 개루왕의 아들이라는데요.

아버지가 166년에 돌아가셨다는데 그 아들인 고이왕은 234년에 임금이 되네요.
그리고 52년간 왕을 했다는데요.

68년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오늘 왕이 되어 52년간 임금을 하였다?
이상합니다..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11대 비류왕도 보시지요. 11대 비류왕은 6대 구수왕의 아들이라는데요.
아버지가 234년에 돌아가셨다는데 그 다들인 비류왕은 304년에 임금이 되네요.
그리고 40년간 왕을 했다는데요.
70년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오늘 왕이 되어 40년간 임금을 하였다??

역시 이상합니다…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8대 고이왕과 11대 비류왕은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직전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대 고이왕은 7대 사반왕을 내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임금이 되었구요.
11대 비류왕은 궁궐 밖에서 살아가다가 10대 분서왕의 아들들이 너무 어려서 신하와 백성의 추대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또 있는데요.

즉, 고이왕이나 비류왕은 후대 임금의 중시조격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8대 고이왕은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2대 계왕의 중시조이구요.
11대 비류왕은 13대 근초고왕 이후의 모든 백제왕들의 중시조입니다.


따라서 고이왕과 비류왕이 누구인지를 밝혀낸다면 백제왕계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영원히 안 될지도 모름 ㅜㅜ…)

3. 11대 비류왕부터 고민해 보았습니다.

11대 비류왕이 누구인지부터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비류왕은 궁궐 밖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신하들과 백성들의 추대로 임금이 된 분인데요.
이를 바탕으로 비류왕의 출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추론을 하였습니다.

첫째, 비류왕은 고이왕계가 아닐 것이다.

만일 비류왕이 고이왕계라면 9대 책계왕의 동생이거나 10대 분서왕의 동생일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비류왕이 고이왕계라면 비류왕 자신도 굳이 그러한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이왕은 백제의 위대한 중흥군주니까요.
오히려 매우 자랑스러워했겠지요.

그럼에도 후대의 백제임금들(=비류왕의 후손들)은 비류왕을 구수왕의 아들로 정리했습니다.  
심지어 고이왕의 마한 목지국 정벌이라는 대업적을 온조왕대에 넣어버렸습니다. 이는 후대의 백제임금들이 고이왕계에 대해 거리감 내지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징표로 보입니다.

고이왕의 업적을 온조왕 대에 넣어서 백제 전체의 역사를 찬란하게 함과 동시에 고이왕을 깎아 내린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비류왕을 고이왕계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둘째, 비류왕은 초고계, 고이계와 다른 제3의 계통도 아닐 것이다.

비류왕은 궁궐 밖에서 살던 분입니다.
권력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하들과 백성들의 추대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당시 백제는 책계왕, 분서왕이 중국 세력에게 죽임을 당하여 국가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서왕의 어린 아들들이 임금이 된다면 모두가 죽는다는 불안감에 궁궐 밖에서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던 비류왕을 백제의 임금으로 모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백제의 권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던 세력은 궁궐 밖에 있는 야인 비류왕이 아니라 진(眞)씨 세력입니다. 진씨는 8대 고이왕 대부터 부상하여 권력을 가진 가문으로 군림하였으니까요.

진씨의 수장이라면 자신들이 백제의 임금을 노려봐도 괜찮았을텐데 굳이 백제의 신하들은 궁궐 밖에 있던 비류왕을 찾아와 임금으로 모셨습니다.
이는 이미 백제 내부에 백제 왕실은 특정 혈족이 해야한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던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조선의 철종이 강화도 도령으로 살다가 갑자기 임금이 된 것처럼요.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비류왕은 분명 백제 왕실의 혈족이 분명하다고 보이구요.

초고계나 고이계와는 전혀 다른 제3의 혈족은 아닐 것입니다.
제3의 혈족이라면 임금 자체가 못되었겠지요. 차라리 진씨가 임금이 되었을 듯 합니다.

셋째, 비류왕은 초고계일 것이다.

비류왕이 고이왕계가 아니면서 제3의 혈족도 아닌 백제의 혈족이라면,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비류왕은 고이왕 이전의 백제 왕실 후손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구체적으로 따진다면 고이왕 때문에 축출된 초고왕 계통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이는 11대 비류왕의 직계후손들의 왕명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13대 근초고왕은 5대 초고왕의 왕명에 가까울 근(近)자를 붙여 지은 것이구요.
14대 근구수왕은 6대 구수왕의 왕명에 가까울 근(近)자를 붙여 지은 것이니까요.


종전에는 단순히 왕명만 보고 비류왕이 초고계일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하였으나, 저는 거꾸로 당대의 상황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비류왕의 출자를 따져보니 비류왕이 초고계일 것이라고 추론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왕명이 초고왕, 구수왕과 비슷한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넷째, 비류왕은 초고왕의 후손 중 누군가일 뿐 구수왕의 아들은 아닐 것이다(결론).

이건 이미 앞에서도 지적을 한 사실이 있지만 비류왕이 구수왕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재위연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비류왕이 초고왕의 후손 중 누군가라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구수왕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인간의 수명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저는 11대 비류왕이 6대 구수왕 동생의 후손 중 누군가 혹은 7대 사반왕 동생의 후손 중 누군가라고 생각을 할 뿐, 구수왕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비류왕이나 그 후대임금들이 비류왕을 구수왕의 아들로 정리한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즉, 11대 비류왕은 5대 초고왕의 후손 중 누구인가이다! 정도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4. 8대 고이왕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11대 비류왕이 초고왕의 후손 중 누군가라면
8대 고이왕의 출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요리조리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고이왕은 비류의 후손이 아닐 것이다.

천관우 선생님의 견해였죠. 고이왕이 비류의 후손이라는 견해였습니다.
근거는 고이왕의 동생이 ‘우씨’이니까 비류의 아버지 ‘우태’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7년(서기 260) 3월, 임금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고이왕의 동생 우수가 우씨이니까 고이왕도 우씨이고, 나아가 비류의 아버지가 우씨인 ‘우태’이니까 고이왕은 비류의 후손이라는 것이 천관우 선생님의 견해인데요.

그런데 저는 천관우 선생님의 견해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비류설화만 보더라도 우태는 해부루의 서손을 참칭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태는 해씨이지 어떻게 우씨가 될 수 있는지 납득이 안되구요.

만일 이러한 방법으로 고이왕을 우태의 후손으로 확정지어 버리면
비류왕마저 우태의 후손이 되어버립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 18년(서기 321) 봄 정월, 임금의 배다른 아우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위 기록을 보시면 비류왕의 아우 이름이 ‘우복’인 것이 확인이 되는데요.
천관우 선생의 논리를 일관성 있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비류왕도 ‘우씨’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비류왕도 비류의 후손이 되어야 하구요.
더 나아가 비류왕 이후의 백제의 모든 왕들은 싹 다 비류의 후손이 되어야 합니다.

즉, 백제는 8대 고이왕 이후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싹 다 비류의 후손이라게 확실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게 합당한 결론입니까?

만일 8대 고이왕 이후부터 모든 백제왕이 비류의 후손인 게 확실하면 온조가 승자로 등장하는 온조설화란 것 자체가 등장할 이유가 없어 보이거니와
온조설화가 비류설화보다 뒤에 등장하였다고 볼 만한 흔적조차 없었겠지요.

혹자는 고이왕을 어떻게든 비류의 후손으로 만들고 싶어서 비류왕에 대해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그가 왜 온조의 후손인지 여러가지 이유를 대나 모두 다 논리의 일관성을 잃은 것에 불과하다고 보이구요.

나아가 고이왕과 비류왕 모두 비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나 (특히 비류왕의 왕호가 비류와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요)
그렇다면 고이왕 이후의 모든 임금이 비류의 후손이 되어버려서
역사의 최종승자가 비류가 된다는 희안한 결론에 이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는 고이왕이 비류의 후손이라는 견해를 따르지 않습니다.

둘째, 고이왕도 온조왕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고이왕의 비류의 후손이 아니라면 고이왕의 출자는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온조의 후손이거나 혹은 전혀 별개의 제3의 성씨이거나!

그런데 저는 고이왕도 온조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① 고이왕의 찬탈 당시의 상황과 ② 왕족들의 이름 때문입니다.

먼저 ① 고이왕 찬탈 당시의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8대 고이왕은 7대 사반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힘으로 쫓아내 버리고 자신이 스스로 임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8대 고이왕에게 이럴 만한 힘이 있으려면 이미 6대 구수왕 시절부터 나름대로 중앙 정계에서 권력을 가졌어야 했을텐데요.

즉, 권신이었어야 한다는 의미이죠.

그 시절에 그럴만한 힘이 있는 세력이 누가 있었을까 따져보니 의외로 몇 없습니다.
[신괴담패설] 백제편 10화에서 보시듯이 고이왕 이전의 유력 가문은 진씨, 해씨, 곤씨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백제의 왕가가 되었다고 볼 만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진씨, 해씨, 곤씨 이외의 제3의 성씨가 백제의 유력가문으로 군림하여
백제의 왕가가 되었다고 보기에도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백제의 신하 가문들 중에서 임금이 되었다고 볼만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고이왕은 초고왕, 구수왕, 사반왕과 같은 백제의 왕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구수왕 무렵부터 권신이 될 수 있었겠지요!

다음으로 ② 백제 왕족들의 이름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희안하게도 고이왕대부터 비류왕대까지의 백제 왕족들은 이름에 ‘우(優)’가 들어가는데요.
일단 초기 백제 왕족들의 이름을 싹 모아보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7년(서기 260) 3월, 임금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고이왕 28년 2월, 진가(眞可)를 내두좌평으로 삼고, 우두(優豆)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고수(高壽)를 위사좌평으로 삼고, 곤노(昆奴)를 조정좌평으로 삼고, 유기(惟己)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비류왕 18년(서기 321) 봄 정월, 임금의 배다른 아우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우수와, 우복은 확실히 왕족으로 보이고, 우두는 별다른 말은 없으나 내법좌평으로 삼았을 정도라면 왕족이 맞다고 보입니다.

천관우 선생님은 ‘우(優)’를 성씨로 보았으나 저는 ‘우’라는 글자가 백제왕족의 성씨라기보다 초기 백제 왕족들의 이름에 사용되는 일종의 돌림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애시당초 백제의 왕성으로 지목된 것은 <삼국사기>에 기재된 ‘부여’씨와 <삼국유사>에 기재된 ‘해’씨입니다.
우씨가 왕성이라고 볼만한 근거가 없다고 보이구요.
나아가 당시의 여러 왕가에서 돌림자를 사용했다고 볼 만한 흔적들이 있습니다.

백제만 하더라도 2대왕부터 4대왕까지 모두 ‘루’자가 공통으로 들어가구요.
신라도 탈해, 내해, 첨해, 흘해와 같이 ‘해’자가 공통으로 들어갑니다.
이러하듯 이 당시 여러 왕가들이 특정 글자를 여러대에 걸쳐 돌림자로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8대 고이왕의 동생이 ‘우수’이고, 11대 비류왕의 동생이 ‘우복’으로 모두 ‘우’자를 돌림자를 사용하므로 결국 고이왕과 비류왕은 동일한 조상을 가진 혈족으로 보이고요.

비류왕이 초고계로서 온조의 후손인 이상 고이왕 또한 온조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입니다(사견).

그러니까 고이왕 동생의 이름이 ‘우수’이고, 비류왕 동생의 이름이 ‘우복’인 것은 이들이 비류의 후손이라는 증거가 아니라모두 다 온조의 후손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고이왕은 온조왕의 후손 중 누군가일 뿐 개루왕의 아들은 아닐 것이다(결론).

이건 이미 앞에서도 지적을 한 사실이 있지만 고이왕이 개루왕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재위연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고이왕이 온조왕의 후손 중 누군가라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개루왕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인간의 수명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저는 8대 고이왕이 2대 다루왕의 동생 후손 중 누군가, 혹은 3대 기루왕의 동생 후손 중 누군가, 혹은 4대 개루왕의 동생 후손 중 누군가로 생각할 뿐, 개루왕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이왕 본인이나 그 후대 임금인 책계왕, 분서왕이 고이왕을 개루왕의 아들로 정리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이왕은 온조의 후손 중 방계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5. 백제 왕실의 왕계조작은 의외로 별로 없었다. 기년 조작이 많았을 뿐이었다!

여러가지로 검토를 해보았으나, 고이왕과 비류왕의 아버지만 조작이 되었을 뿐 그 외의 왕계조작은 특별히 발견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년이 지나치게 불려져서 백제가 이른 시기에 건국된 것처럼 둔갑되었을 뿐이지요.

백제인들은 비류의 미추홀국 세력과 연맹을 맺으면서 당초에 ‘비류’ 혼자만 등장했을 비류설화의 원형에 온조를 비류의 동생으로 낑겨넣어 우리가 알고 있는 비류설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온조는 갑자기 기원전 1세기에 주몽의 궁궐을 탈출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초기 백제는 고구려의 ‘좌우보제’를 똑같이 따라서 실시했는데 고구려에서 좌우보제가 실시된 것은 3대 대무신왕 때부터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온조는 주몽 혹은 유리왕 대에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대무신왕 이후에야 탈출을 했다고 보아야지요.

그런데 백제인들은 시조 온조가 주몽 대에 활동한 것으로 뒤바뀌어 버렸기 때문에 온조왕은 물론이고 후대 임금들의 수명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은 숙명적이었다고 할까나요.

이렇듯 백제 왕실계보는 건국설화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년조작이 숙명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의외로 왕계 자체가 조작된 흔적은 별로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고이왕과 비류왕의 아버지 부분 이외에는 모두 다 믿을만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히려 저는 백제왕 계보에 ‘기년조작’이 행해진 것 때문에 이에 대한 나비효과로 신라인들도 신라의 왕계보를 정리하면서 ‘기년조작’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는데요.

이건 신라편에서 풀어보도록 하지요.

6. 백제의 숭조작업은 누대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백제의 역사가 최로로 문자로 남은 시기는 근초고왕 시기입니다.
이는 <삼국사기>상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초기 역사는 모두 근초고왕 시기에 정립이 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그때마다 역사에 손을 댈 수 있었고, 이러한 과정은 누대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뤄집니다.

1) 온조설화의 창작(= 5대 초고왕 또는 6대 수구왕)

저는 온조설화가 본격적으로 창작된 시기를 5대 초고왕 또는 6대 구수왕 시기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백제는 비류 세력의 미추홀 지역을 병합해 버리고 군대를 사열하는 등 한강 하류 유역의 완전한 강자로 떠오릅니다.
비류 세력을 병합했기 때문에 온조의 후손인 초고왕, 구수왕은 비류 세력을 완전히 통합하기 위해서 온조설화를 창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온조 세력은 비류 세력에게 말합니다.

“너희 시조는 불행하게 죽었다.”

제가 초고왕, 구수왕 시기에 온조설화가 창작되었다고 본 것은 여전히 ‘비류’가 온조의 형으로 등장히기 때문입니다.아직 비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설화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더 후대에 온조설화를 창작했다면 비류 자체를 아예 삭제시켜 등장조차 못하게 했을 것이니까요.

2) 고이왕 계통의 왕계 조작(= 8대 고이왕~10대 분서왕)

고이왕은 온조왕의 적자 7대 사반왕을 내몰아 버리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정통성이 당연히 부족합니다.
그 시절에 정통성 개념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이왕이 부도덕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일부는 있었을테지요.

또한 고이왕 스스로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 만연해 진다면
언젠가 자신의 후손도 똑같은 방법으로 몰아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을 겁니다.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는 방법은 왕계조작 말고 무엇이 더 있을까요?

분서왕 이후의 임금들은 고이왕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고이왕의 출자를 변경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이왕의 출자는 고이왕 당대 혹은 그 직계 후손인 책계왕, 분서왕 대에 꾸며진 것으로 보입니다.

3) 비류왕 계통의 왕계 조작(= 11대 비류왕 또는 13대 근초고왕)

비류왕은 궁궐 밖에서 살다가 갑자기 임금이 된 초고왕의 방계 후손입니다.
지나치게 방계면 역시나 정통성이 부족하지요.
그래서 비류왕도 스스로 혹은 그 아들인 근초고왕이 비류왕의 왕계를 구수왕의 아들로 꾸민 것으로 보입니다.

근초고왕 무렵엔 이미 문자로 역사가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그보다 후대의 임금이 비류왕의 출자를 바꿨다고 보이지는 않구요.
아무리 늦어도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 대에 출자가 정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4) 마한 목지국 정벌의 시기 조작(= 11대 비류왕 또는 13대 근초고왕)

마한 목지국 정벌은 8대 고이왕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그럼에도 이 업적은 1대 온조왕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런 조작을 했을까요?

고이왕 계통이 했을리가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11대 비류왕이나 13대 근초고왕이 했겠지요.
마찬가지로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 조작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므로

아무리 늦어도 근초고왕 대에 조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정말로 꾸준하게 누대에 걸쳐 역사에 손을 댔다는 결론에 이르는데요.권력의 속성에 매우 부합하는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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