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때 포로가 되었던 수나라 장군들에 대한 기록

고구려는 한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시기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솔직히 조금만 더 힘냈으면 중국까지도 먹을 수 있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죽하면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본인들의 속국이었다며 말도안되는 억지를 부릴까요
그만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인데
한편으로는 무서운 나라였기도 합니다.

툭하면 전쟁을 일으켰고 툭하면 영토확장을 다녔으니 군인들과 국민들입장에서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래서 오늘은 조금 특별한 주제입니다.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온 수나라 장군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622년, 수나라 멸망 후 새로 들어선 당나라와 고구려가 화친을 맺으면서 포로 교환 (고구려 영류왕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찾아 모아 수나라 포로 1만여명 송환)

5년(서기 62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당 고조(高祖)가 수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나라에 붙잡힌 것을 염두에 두고, 임금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내가 공손히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삼가 천ㆍ지ㆍ인의 삼령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므로,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왕은 요동의 동쪽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제후국의 자격으로 중국의 역법을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거르지 않으며, 사신을 보내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거듭 펴 보이니, 나는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여 예물이 내왕하되 길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의 말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재난이 얽혀서, 서로 싸우던 곳에서는 각각 자국의 백성들이 유랑민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부모와 형제들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었으니 의(義)에 어긋난 바가 없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도 왕이 돌려보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넓혀 나가자.”

이리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서 돌려보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의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唐高祖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焉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輯睦 永敦聘好 各保疆埸 豈非盛美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氓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 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撫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네이버 지식백과] 영류왕 [榮留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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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41년 고구려 영류왕 말기에도 여전히 고구려 내에는 수나라 포로들이 다수 존재

24년(서기 641),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왔다. 대덕이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므로,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여,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중국인으로서 수나라의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임금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나라의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은 황제에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고창(高昌, 중국 신강 지방에 있던 나라)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에서 접대하는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수만 명의 병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東萊)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山東)의 여러 고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因奉使覘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 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 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 凋瘵未復 吾不欲勞之耳

[네이버 지식백과] 영류왕 [榮留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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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권 196에 ; ” 당 태종이 職方郞中 陳大德을 고려에 사절로 보냈다. 8월 기해에 고려에서 돌아왔다. 대덕이 처음 그 땅에 들어가, 산천풍속을 알고자 하여, 지나는 城邑마다 그 관리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는데, 여기에 경치가 좋은 곳이 있으면 내가 보기를 원한다’하니 수비하는 자가 즐겨 그를 이끌어 주어 그의 발걸음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왕왕 중국인을 보고 그 가족이 某郡에 있다고 말하고, 隋末에 從軍한 자는 고려에서 죽거나, 고려가 遊女를 妻로 삼게 하고, 고려사람과 함께 뒤섞여 사니, 거의 半이나 되었다. 親戚 存亡을 물어 大德이 모두 無病하다 하면 감격하여 서로 눈물을 흘렸다. 며칠 후에 隋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우는 사람들이 郊野에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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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경남 하동 쌍계사에 있는 신라말 고승 진감선사 비문 (최치원이 지음)에 있는  진감 선사의 가계에 대한 기록

진감선사 혜소선사 비문 자료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경내에 있는 河東雙溪寺眞鑑國師大空塔碑(국보 47호)를 탁본해 만든 탁본 첩이다.

* 최치원의 撰書한 비명을 崇禎紀元之九十八年(1725녀) 光先의 刻字로 다시 목판각하여 인출한 <진감선사비명(眞鑒禪師碑銘)>으로 16장 분량이다. 표지 개장외 본문상태 양호하다.

* 淸 世宗3년(1725)에 판각된 것임에도 明17대 崇禎帝(1627∼1644)의 年號를 써 崇禎紀元之九十八年이라 기록.

* 河東雙溪寺眞鑑國師大空塔碑(국보 47호)는 귀부(龜趺)와 이수(이首) 및 비신(碑身)을 완전히 갖춘 탑비로, 신라 말기의 탑비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말의 고승이던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 774∼850)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헌강왕(875∼886)의 지시로 선사가 불도를 닦던 옥천사(玉泉寺)를 쌍계사로 고친 뒤에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신라말을 대표하는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필체는 당시 유행하던 구양순체로 쓰여 있다.

* 선사의 속성은 최씨(崔氏)로 애장왕 5년(804)에 불법을 닦기 위해 당나라에 유학하여 신감대사(神鑑大師) 밑에서 스님이 되었다. 헌강왕 2년(810)에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3년간을 더 불법을 익힌 뒤에 흥덕왕 5년(885)에 귀국하여 당시 왕들의 숭앙을 받으며 신라에서 선을 가르치다가 문성왕 12년(850)에 입적(入寂)하였는데 향년 77세였다. 그 뒤에 헌강왕 11년(885)에 왕이 진감선사라 추증하고 탑호를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 대사는 범패(梵唄)에 능하여 그 많은 소리로서 또한 대중을 교화하였음은 유명하다. 탑비의 모습을 살펴보면, 귀부의 등에는 간결하게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조각되어 있으며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어 있다. 귀갑(龜甲)의 중앙에는 방형의 비좌(碑坐)가 비신을 받고 있는데 네 면에 구름문양(雲文)이 양각되어 있다. 탑신(塔身)은 균열과 마멸이 심하나 이수에는 보주(寶珠)를 다투는 반룡(蟠龍)이 4면에 힘차게 조각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네모진 제액(題額)이 마련되어 있다. 정상에 앙련과 보주(寶柱)를 얹었다. 제액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비명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다.

* 최치원이 쓴 4산비명(四山碑銘) 중에서도 으뜸으로 글자지름 2.3cm의 해서(楷書)로 마멸이 심하여 건립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원년(1725)에 목판에 옮긴 비문에 의해 88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총 높이 3.63m, 비신 높이 2.02m, 비신 폭 1m이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 그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유당 신라국 고 강주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대공탑 비명

전서국 도통순관 시어사 내봉공 사 자금어대 신 최치원은 교지를 받들어 찬술함.

대저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아니하고 사람은 다른 나라가 없다 이르므로 동방사람의 아들이 석(釋)이 되고 유(儒)가 되는데는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에 떠서 이중 삼중 통역을 거쳐 유학 할 제 목숨은 조각배에 부쳤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행하였다.

빈것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고 어려움을 먼저 한 뒤에 소득이 있었으니 마치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높은 것을 꺼리지 아니하고 주를 더듬는 자는 용이 잠든 물속의 깊은 것을 피하지 아니함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횟불을 얻어서 빛이 오승에 통하고 아름다운 음식을 얻어 맛이 육경에 배불렀다. 다투어 청문으로 하여금 선으로 들어오게 하고 능히 일국으로 하여금 인에 흥기되게 하였다.

학자들이 혹 말하기를 인도와 궐리의 교를 설하는 것이 흐름이 나누이고 체(體)가 달라서 둥근 구멍에 모난 나무를 박는 것이라 하여 서로 모순되어 각기 한모퉁이만 고집한다.

내가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를 설하는 자는 문으로서 사(辭)를 해하지 아니하고 사로서 뜻을 해하지 아니할 것이니,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일단 뿐이리요 대저 각기 마땅한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산의 혜원이 논을 지어서 여래와 주공 공자가 출발한 것은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바는 한가지이니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는 것은 물이 능히 겸하여 용납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심약의 말에 공자는 발단(發端)을 하였고 석씨는 극치가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것을 아는 이로서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말 할 수는 있다 하겠도다. 불이 말한 심법은 현(玄)하고 또 현(玄)하여 이름으로 이름 할 수 없고 설하려 하여도 설할 것이 없어서 비록 달(月)을 얻었다 이르나 손가락을 혹 잊어버려 마침내 바람을 매고 그림자를 포착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러나 멀고 높은데로 오르자면 가깝고 낮은데서부터 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글로써 표현한들 무엇이 말을 하리요 하였으니 곧 저 정명이 침묵으로써 문수를 대한 것과 선서(善逝)가 비밀히 가섭(迦葉)에게 전한 것은 혀를 놀리지 아니하고 능히 심인에 맞은 것이니 하늘이 말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을 어디에 가서 얻으리요.

미묘한 도를 멀리 전하여 우리 고장에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가 그분이다. 선사는 법휘는 혜조요 속성은 최씨이다. 그 선대는 한족으로 산동의 명문이었는데 수나라가 요동을 칠 때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고 뜻을 굽혀 그곳의 백성이 된 자가 있었으니 당에 이르러 사군을 점령하매 지금은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창원인데 재가 하면서 출가의 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가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중이 와서 이르기를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로서 표적을 삼더니 얼마 안되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나면서 울지 아니하였으며 곧 일찍부터 소리없고 말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났던 것이다. 칠팔세가 되자 유회할 때에 반드시 잎을 태워서 향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삼았으며 혹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시간이 지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선의 뿌리가 실로 백천겁(白千劫)전에 심어진 바이요 배워서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십여세로부터 이십세에 이르기 까지 부모를 봉양하기에 뜻이 간절하여 잠깐도 잊지 아니하였으나 집에 저축이라곤 없었고 또 농사지을만한 땅도 없어서 부모의 봉양은 오직 자기의 노력으로만 해야 되었기 때문에 이에 생선 장사를 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손으로는 그물을 맺지 아니하였으며 마음은 이미 통살을 잊는데 계합하였다. 숙수의 즐거움으로 지성으로 봉양하다가 상을 당하자 스스로 흙을 저다가 성분하고는 말하기를 길러준 부모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미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 내가 어찌 박과 오이가 둥글에 매인 것처럼 젊은 나이에 한구석에 박혀 있으리요. 하고 드디어 정원 년간에 당나라로 가는 세공사에게 찾아가서 선장이 되기를 청하여 몸을 의탁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널적에 고된 일을 많이 하고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겼다.

자비의 배에 노를 저어서 고해를 질러 건넜었다. 피안에 도달하자 국사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뜻이 있는 것이니 나는 여기서부터 하직하겠소” 하고 드디어 행하여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뵈옵고 절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장난삼아 이별한지가 멀지 아니하였는데 두번 서로 만남이 기쁘구나” 하고 문득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히고 심인과 계를 함께 주니 마른 쑥에 불을 부치고 낮은데로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무리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이에 다시 보겠다 하였다. 선사의 얼굴빛이 검으므로 모두가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지목하여 흑두타라 했으니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묵묵히 행함이 진정 칠도인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읍중의 검은 자가 능히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길 것이랴. 영원토록 수염이 붉은 불타야사 및 눈이 푸른 달마와 함께 색상으로써 나타내 보이리라. 원화 오년에 구족계를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 곁에서 받으니 어머니의 전일의 꿈이 완연히 부합했다,

이미 계주가 밝았으매 다시 경을 배웠다. 하나를 듣고는 열을 알매 강색이 꼭두서니에서 나와 꼭두서니 보다 붉었고 청색이 쪽에서 나와 쪽보다 푸르렀다. 비록 고인 물처럼 맑은 마음이나 조각 구름같이 떠다니는 자취였다. 고향의 중 도의라는 이가 먼저 중원으로 도를 물으러 왔었는데 뜻밖에 서로 만나 기뻐하며 친구가 되어 사방으로 멀리 참례하고 찾아 불도를 증득하였다.

도의 는 먼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선사는 바로 종남산에 들어가 만길봉우리에 올라가서 솔씨를 따먹으며 적적하게 지관하기 삼년이요 뒤에 자각으로 다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 당하여 짚신을 삼아 보시를 널리하여 왕래하기 또 삼년이었다. 이리하여 고행을 닦기를 이미 닦았으매 다른 곳으로 다시 놀기도 하였으매 비록 공을 공부한다 할지라도 어찌 근본을 잊어서 될 것인가.

드디어 태화 사년에 돌아오매 대각의 상승이 우리의 어진 강토를 비쳤다. 흥덕대왕이 친히 수레를 타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 선사가 전일에 돌아왔더니 상인이 잇달아 이르렀으매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검은 옷입은 호걸이 있었다 들었더니 지금에 누더기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미천의 자 위를 온 나라가 통틀어 기쁘게 의지하겠도다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 지경으로 길상의 집을 만들리라” 했다.

처음에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석장을 멈췄는데 의원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 같았으매 절간이 비록 넓었으나 사람들이 자연 군색했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 지리산에 이르렀는데 몇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함이 유순한 말과 다르지 않았으며 따르는 사람들도 두려워함이 없어 마치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선무외삼장이 영산에 하안거를 하는데 맹수가 길을 앞서 깊이 산혈로 들어가매 모니의 입상을 본것과 사적이 완연히 같으니 저 축담유가 자는 범을 두드려 경을 듣게 한일 그것만이 홀로 승사에 미담이 될수 없다.

화개곡에 옛 삼법화상의 절터를 그대로 인하여 절을 지으니 엄연히 화성이 같았다.

개성 삼년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오르자 깊이 자비에 의탁하려고 새서(璽書)를 내려 공양할 물자를 보내고 특별히 기원할 것을 청했는데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정사를 닦는데 있을뿐 기원해 무엇하리요” 하고 사신이 돌아가 왕에게 복명하니 왕이 듣고 부끄러워하고 깨달아서 선사가 색과 공이 함께 소멸되고 정과 혜가 모두 원만하다 하여 사신을 보내 호를 주어 혜조라하니 소자는 성조의 어휘이므로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인하여 대황룡사에 적을 옮기게 하고 서울로 오라고 불렀는데 사자의 왕래가 길게 고삐를 이었으나 산악처럼 꿋꿋하여 그 뜻을 옮기지 않았다.

옛날 조승이 원위의 세번 부름을 거절했다 했으니 산에 있어 도를 행하매 대통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깊숙한데 살아서 고상함을 길는 것이 시대는 달랐으나 지취는 한가지다.

두어 해를 머물매 가르침을 청하는 자 벼와 삼대처럼 늘어서고 성같이 에워싸서 거의 송곳 꽃을 틈조차 없었다.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령의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

사찰을 창건하는데 뒤로는 노을 끼는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안계를 맑게 하는 것은 강건너 먼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 구멍에서 쏫는 나르는 여울이 있다.

더욱이 봄에 피는 시내의 꽃과 여름에 그늘지는 길옆의 솔이며 구렁을 비추는 가을의 달과 봉우리를 덮는 겨울의 눈들이 사시 변하고 만상의 빛을 번갈으며 백가지 울림소리가 어룰려 읊조리고 수 천개의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서토에 놀던 자가 와서는 모두 보고 깜짝 놀라 이르기를 “혜원의 동림사를 바다건너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는 범인의 상상으로 비겨 볼바 아니로되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더니 정말인가” 했다.

대로 흠을 만들어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에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 비로소 이름하여 옥천이라고 현판을 붙였다.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다 이에 육조의 영당을 세워 분바른 벽에 단청으로 채색하여 널리 신도를 귀의시키는 데에 이바지 하니 경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문채를 섞어 여러상을 그린다” 함이 었다.

대중사년 정월 구일 이른 아침에 문인에게 말하기를 만가지 법이 다 공이니 내 장차 가련하다. 하나의 마음이 근본이나 너희들은 힘쓸지니라,

“ 탐으로서 형해를 갈무리지 말고 명으로써 행적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고 말을 마치자 않아서 열반에 드니 칠십칠이요 중이 된지 사십일년이었다.

그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었는데 바람과 우뢰 소리가 혼연히 일어나며 호랑이는 슬피 울부짖고 삼나무.잣나무는 변하여 시들더니 이윽고 자줒빛 구름이 하늘에 자욱하고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사에 모인 자는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양나라 역사에 실려 있기를 “저시중 상이 일찍이 사문을 청하여 어머니의 병환을 위해 복을 빌즈음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났다” 했으니 성자의 영감으로 명명중 응함이 어찌 헛되다 할 것인가. 무릇 도에 뜻을 둔자는 글을 보내어 멀리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하는 이는 슬픔을 머금어 울었으니 하늘과 사함이 애도함을 단연히 알 수 있다.

관곽과 묘혈을 미리부터 준비 했으매 제자 법량등이 울부짖으며 색신을 모셔서 날을 넘지지 않고 동쪽 산봉우리에 장사 지내니 유명을 좇음이었다.

선사는 성품이 산하지도 아니하며 박하지도 아니하고 말은 꾸미지 않았으며 옷은 헌 솜과 굵은 삼베도 따스했고, 밥은 겨와 귀리도 달게 먹었다.

꿀밤과 콩에 섞인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으며 귀한 손이 가끔 왔으나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으매 문인이 깨끗지 못한 음식을 귀한 손님에게 드리기 어려워하면 곧 이르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까지 왔으니 추식인들 어찌 상관하랴” 했다.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한결같이 대접했으며 가끔 왕사가 역마를 타고 와서 왕명을 전하여 멀리 법력을 빌면 곧 말하기를 “무릇 왕토에 살고 불일을 이고 있는 자로서 주군들 호국하는 일념에 마음을 기울여 왕을 위해 복을 쌓지 않으리요 무엇하려 마른 나무 썩은 등걸 같은 나에게 멀리 윤언을 욕되게 할 것인가. 사람과 말 일행이 굶주릴 때 먹지 못하고 목마를 때 마시지 못하는 것이 저욱이 마음에 걸린다” 했다.

어떤이가 호향을 선사하니 기와에다 잿불담아 환을 짓지 않은 채로 태우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뿐이다”. 했으며 다시 중국의 차로 공양하는 이가 있으니 섶으로 돌솥에 불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로 끓여 마시며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아지 못한다. 창자를 적실 뿐이다” 했으니 진을 지키고 속을 싫어함이 다 이런 등류이었다.

평소부터 범패를 잘 불렀으니 그 목소리가 금 옥 같아서 곁들인 음조와 날아가는 소리가 상쾌하여 애완하여 능히 제천으로 하여금 환희케 하고 길이 먼곳까지 흘러 전했으며, 배우는 자가 당에 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지금껏 동국에서 어산의 묘한 곡조를 익히는 자가 다투어 손으로 코를 가리고 옥천의 남긴 음향을 본뜨려 하니 어찌 성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리오.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이 마침 문성대왕때 였는데 왕이 마음이 칙연하여 장차청정한 시호를 내리려 하다가 그 유계를 듣고는 부끄러워해 그만 두었다.

삼기를 지난 뒤에 문인이 세월이 오래되면 언덕이 골짜기가 될 것을 염려해서 법을 사모하는 제자들에게 길이 썩지 않게 할 인연을 의론했더니 내공봉 일길한 이 굳게 합심하여 돌에 새기기를주청했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로 넓히고 진종을 흠양하여 진감선사라 추시하고 대공령탑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전자의 새김을 허락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영구히 하도록 했다.

거룩하다 해가 양곡에서 떳으매 깊숙한 데까지 비치지 않음이 없고 향을 해안에 심었으니 오랠수록 더욱 향그럽다.

어떤이가 말하기를 “선사가 탑하지 말라 명하지 말라” 는 훈계를 남겼는데 지금에 문도들이 능히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네들이 구했던가 아니면 위에서 주었던가 실로 백규의 티가 될 뿐이로다. 했다 슬프다 그르게 여기는 자 또한 그르다 이름을 가까이 않으렸는데 이름이 떨쳐진 것은 원래 정력의 남은 보답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처럼 끊어지기 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으로 하여금 대천세계에 떨치도록 함이 어느것이 낫다 하겠는가.

귀석에 비를 얹기 전에 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니 형체가 서로 잔했으매 유촉에 따라 착한 일을 계승하였다. 근처의 산에 절이 있어 옥천이라 불렀으니 이름이 중복되어 듣는이 분간하기 어려웠다.

장차 같은 것을 버리고 든 것을 취하자면 마땅히 옛것을 떠나서 새것을 지어야 했으므로 하여금 그절의 전후를 둘러보게 한바 문깐이 두갈래의 시내에 다달아 있다고 복명했으므로 이에 쌍계란 제호를 주었다.

신에게 명해 이르기를 선사는 행적으로 나타났고 너는 글로써 출신했으니 마땅히 명을 지으라 하셨다.

치원이 손들어 절한 후”네네” 하고 대답했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초년에 중원에서 이름을 얻어 장구의 사이에서 아름답고 맛난 것을 맛보았으나 미처 거리에 둔 술 항아리를 마시어 취하지 못했으매 오직 진흙 속에서 허우적 거림이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음 문자를 떠났으매 말은 부칠 곳이 없으니 혹 말한다면 수레채를 북으로 하여 영 땅에 가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국왕의 외호함과 문인의 대원은 문자가 아니면 뭇 사람의 눈에 소상하게 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몸은 양역에 겸하고 힘은 오능을 본받으려 하노니 비록 돌이 혹 말을 한다면 부끄럽고 두려우나 도란 것은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그른 것인가 붓으 꺽고 만다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하랴 앞에 말한 뜻을 거듭 술하여 삼가 명을 짓는다.

선정으로 입다물고 불타에 귀심했네. 근숙한 보살이 이 도를 넓혔도다 담크게 호굴을 더듬었고 멀리 경파를 넘었구나. 가서는 비인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깊은 승지 찾아 골라 바위 벼랑에 절을 지었네. 물과 달에 마음 밝히고 구름과 샘물에 흥을 부쳤네. 산은 성과 함께 적연하고 골은 범패소리에 메이리쳤네. 경계에 닿는 곳마다 걸림이 없고 기심을 끊었으니 이가 곧 증독이다. 도는 다섯 왕조 험찬했고 위엄은 모든 요귀 꺽었었네.묵묵히 자비 음덕 드리우면서도 겉으로는 부름을 물리쳤네. 바다야 제대로 표탕하나 산이야 어찌 동요될까. 사려가 없었으매 다듬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았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않았으며 옷은 갖추어 입지 않았다.

바람 비가 그믐밤 같은데도 시종이 한결 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빼어나는데 법의 동량이 갑자기 꺽였다. 골과 구렁이 처량도 하고 연하와 등라가 초췌하다. 사람은 가도 도는 남었으니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

상사가 소원을 진달했으매 대군이 은덕을 베풀었네. 등불은 동해에 전해왔고 탑은 구름속에 솟구쳤네. 천의가 돌을 스치도록 영원히 송문에 빛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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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금석문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임을 밝히며, 고향은 전주 근처의 금마로 적고 있다. 또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해선 수나라 때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구려에 눌러 살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금마로 내려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라 외에 고구려 계통에서도 최씨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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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출신으로 최씨 성을 가졌던 진감선사 선조들의 행적을 요약하면,

수나라 당시 산동의 한족 명문가 출신  ->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전에 참전했다가 패전하여 항복하고 포로가 됨  ->  중국계 고구려인으로 고구려에 정착 (고구려 遊女와 결혼?) –> 나당 연합군에게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 후손이 고구려 유민으로 신라로 이주하여 전북 금마 지역에 정착 (보덕국인?) -> 전주 최씨의 시조가 됨.

​전주 최씨 유명인: 조선시대 최명길,  대한민국 연예인 최진실,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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