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된 왕 광해군?

올리게 된 이유는 광해군이 너무 미화된거 같아 올려봅니다
광해군에 대해서 실록 같은거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광해군은 분명 세자시절에는 영웅이 분명하지만 왕으로 즉위 했을때는 폐위될만한 폭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글에서 쓸 내용을 먼저 요약하자면

1.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근거로 사르후전투 파병때 ‘밀지설’을 근거로 하던데 사르후전투에 파병된 병사 1만3천중 8천명이 장렬히 싸우다 전사함.. 항복할만한 상황이었고 명에서 고맙다고 보상금도 줌. 즉 중립외교는 과장됨

2.광해군은 막대하고 무리한 궁궐공사로 민생을 파탄시켰고 물가를 폭등시킴

3.광해군은 대동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보였음

이제 써보도록 하겠고
우선 중립외교가 왜 과장됬는지 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광해군이 왜 폭군인지부터 보고 싶으신분들은 조금 내려서 2)광해군이 폭군인 이유부터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광해군의 중립외교

중립외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명에 파병된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어 상황을 보고 항복하고 하는 내용인 ‘밀지설’일겁니다 그러나 이 ‘밀지설’은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인데 그 이유는 조선,명,여진의예허지원군과 후금이 싸운 ‘사르후 전투’를 아시는 분이라면 아실겁니다

이때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1만3천명을 파병보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명나라는 장수 314명 전사 군사 4만 5870명 전사 말 2만 8400필을 손실했고 조선군은 좌우영이 전멸하고 8천명이 전사했습니다 그것도 장렬히 싸우다가요 그 중 김응하 장군이 제일 멋있게 전사했습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심하(深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적은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격파하고,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갑자기 부거(富車) 지방에서 노추(奴酋)의 복병을】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 뭉개고 죽여대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광해군

우리 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왼쪽이 후금 오른쪽이 조선)

그러나 재차 진격하였다가 잠시 후퇴하는 순간 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ob_11103012_001

좌우영 전멸 1만3천중 8천명이 전사 이후 항복하는 강홍립
강홍립은 이처럼 항복한 상황이 되어서 항복한 것입니다

밀지설이 처음 등장할때는 인조반정때 명분중 하나로 등장한 것인데 이 사르후전투 때 조선군을 보면 신빙성이 떨어지죠

명나라에서 고맙다고 상금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b_11102021_004)

2) 광해군이 폭군인 이유

사실 밀지설은 아니지만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했다는 학자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광해군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들 조차도 광해군의 내치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지금부터 그 근거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무리한 궁궐공사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광해군은 무리한 궁궐공사로 백성들의 원망을 샀습니다
흉년이 들었든 명나라 사신대접하느라 돈 쓸일이 많은날이든 말이죠
신하들이 궁궐공사 중단해달라는 상소만 궁궐공사 라고 실록 홈페이지에 검색만 해도 이정도로 나옵니다
궁궐공사라고 검색만 해도 광해군일기가 제일 많죠

그 중 몇가지만 옮겨 보자면

광해군일기[정초본] 127권, 광해 10년 윤4월 17일 을해 5번째기사

지사(知事) 심돈(沈惇) 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사납고 교만한 노추(奴酋) 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강대해진 나머지 으르렁거리며 집어 삼킬 계책을 세우고 끊임없이 중국을 혼란에 빠뜨릴 뜻을 품고 있으니, 반드시 형세상 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무원(撫院)의 자문(咨文)에 ‘무단히 전쟁을 일으켜 계획적으로 무순(撫順) 을 습격했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나 저돌적으로 도발해 온 정상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었는데, 지금 구 유격(丘遊擊) 이 보내온 표문(票文)을 보니 ‘그…

광해군 일기 10년 4월 17일 기사를 요약하면

예조판서 심돈이란 사람이

“노추(누르하치, 당시 후금의 지도자)가 점점 강성해져서 중국을 혼란스럽게 만들 계획을 품고있어 형세상 일을 낼 것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도 아는 일이고 우리가 명나라에 파병을 보낸것 때문에 공격해 올수도 있다

근년에 나라에 큰 공사가 있어 부역이 무겁게 자주 이루어 져서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고 있다

궁궐공사를 중단 시키고 그럴수 없다면 지금 두 궁궐이 동시에 지어지고 있으니 하나만 중단 시키고 방비하는 일에 전념해달라” 고 말했더니 광해군은 “궁궐공사는 반이나 추진하였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안된다”고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6011_002

광해군일기[중초본] 116권, 광해 9년 6월 11일 갑진 2번째기사

【새 궁궐을 새문동(塞門洞) 에다 건립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성지(性智)가 이미 인왕산 아래에다 신궐을 짓게 하고,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김일룡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이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터는 두 구역이 있는데, 하나는 사직 담장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인왕동(仁王洞)에 있는 바, 바로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淸心堂) 터이다. 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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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광해군 9년 6월 11일 기사를 보면 인왕산에 왕기가 흐른다는 이유로 궁궐을 짓는다고 민가 수천채를 헐었으며

http://sillok.history.go.kr/id/kob_11005016_002

광해군일기[정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16일 계묘 2번째기사

형조 판서 조정(趙挺) 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양궁(兩宮)의 공사를 정지하여 인심을 수습하소서. 군졸을 가려 훈련시켜서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리고 신의 본직(本職) 및 겸대한 영건 도감 당상의 직책을 체차하여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다만 경이 내간(內間)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니 간략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이 즉위한 뒤 경운궁(慶運宮) 에 임어(臨御)해도 충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오래도록 창덕궁(昌德宮) 으로 이어(移御)할 생각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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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역시 형조판서가 궁궐을 중단하고 나라방히에 힘쓰자고 하는데 광해군은 자기가 살고 있는 궁궐에 귀신이 나온다고 안된다고 합니다

이거 말고도 궁궐공사 중단은 백성의 소망이라는 상소,궁궐공사 때문에 나무값이 금값이 되었다는 상소 등등 많습니다

-2 대동법 반대 (사료 읽기 귀찮으시면 요약된 굵은 글씨만 읽으시면 됩니다)

광해군의 업적하면 떠오르는게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대동법시행 일겁니다 대동법을 시행한 왕은 광해군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대동법을 반대했고 시행지역이 확대될수있었음에도 광해군의 반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때 역사선생님께 물어봤더니 사실이지만 시행한건 광해군이니까 시험에는 그렇게 나온다더군요

(대동법을 반대하는 광해군)

요약(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가 모두 ‘특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바치게’ 했던 데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런데 이번 방납으로 교활한 수단을 부리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이 ‘작미’라는 방법이 있었으니, 이는 그 근원은 맑게 하지 않고 하류만을 맑게 하고자 한 데 가깝지 않은가.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13권, 광해 1년 2월 5일 정사 1번째기사 1609년 명 만력(萬曆) 37년

중국 조사가 돌아간 뒤 선혜청 작미의 일을 다시 의논하라고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일전에 인견했을 때 승지 유공량(柳公亮)이 선혜청(宣惠廳) 작미(作米)의 일이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대략 말하였다.
당초 나의 생각에도 이는 진실로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본청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기에 우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량의 말을 들으니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나라를 소유한 자가 모두 토양의 실정에 맞게 공물(貢物)을 바치게 한 데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방납(防納)에서 교활하게 물건 값을 올려받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이 작미의 일이 있었으니, 그 근원은 맑게 하지 않고 하류(下流)만을 맑게 하고자 한 데 가깝지 않은가.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만약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을 편하게 해주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기강을 세우고, 방납하고서 지나치게 징수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자세히 밝혀 혹 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려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조종(祖宗)의 헌장(憲章)을 준행해 어기거나 잊지 않는 것이 좋은 계책인 듯하다.

송(宋)나라의 신법(新法)006) 이 그 뜻이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데 있었겠는가마는 마침내 구제하기 어려운 화를 불렀으니, 옛 헌장을 변경하는 것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가령 이 일이 폐단은 없고 유익함만 있다 하더라도 춘궁(春窮)에 쌀을 내게 하는 것은 그 시기가 아닐 듯하니, 조사(詔使)가 돌아가고 가을이 와서 곡식이 많아질 때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
이 뜻을 대신에게 말하여 다시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광해군은 영구히 시행 될수 없다고 폐지 의사를 보였습니다 또한 옛날부터 특산물 했기때문에 특산물로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죠

대동법의 강원도 확산을 막는 광해군

요약
강원관찰사, 선혜청 : 백성들이 원한다는데 강원도에도 실시하는거 어떰?

광해군:다른도까지 실시하는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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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정초본] 35권, 광해 2년 11월 22일 계해 4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강원 관찰사 홍서봉이 선혜청 작미가 속히 시행 되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치계하다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洪瑞鳳)이 치계(馳啓)하기를,

“선혜청의 작미(作米)에 관한 공사(公事)에 대해 백성의 뜻이 귀일되어 모두 편하게 여기면서 빨리 시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청이 보내온 공문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수령 두 사람을 가려 차사원(差使員)으로 삼은 뒤 서울로 올려 보내 사목(事目)을 자세히 정하게 하는 한편 두 사람에게 모든 일을 위임해 본청의 분부를 듣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은계 찰방(銀溪察訪) 심즙(沈諿)은 평소 일처리에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다 본도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수령은 아니지만 홍천 현감(洪川縣監) 윤신지(尹愼之)와 함께 올려 보냈습니다.
특별히 본청으로 하여금 조속히 사목을 정해 시행케 함으로써 산골 백성들이 애타게 바라는 소망을 위로해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선혜청이 회계(回啓)하기를,

“본도 백성들의 뜻이 그러하니 경기의 예에 따라 사목을 마련해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만 강원도의 경우 전결(田結)은 적지만 갖가지 공부(貢賦)는 기전(畿甸)보다도 많은 실정입니다.

따라서 기전에 대해서 1 결(結)당 미곡 16 두(斗)씩 내게 했습니다만, 강원도의 경우 이 숫자로는 1년의 공부를 충당하기에 부족하니 부득이 4 두를 더 배정하여 1 결당 미곡 20 두씩 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15 두는 에 바치게 하여 항공(恒貢) 및 연례 별복정(年例別卜定), 전세조 공물(田稅條貢物), 기인(其人), 조례(皀隷), 과원 결실(果園結實), 관상감 월과지(觀象監月課紙) 등의 값으로 충당케 하고, 5 두는 그대로 본도에 주어 매월의 진상물(進上物),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 각참(各站)의 쇄마(刷馬)·적초(積草)·파발(擺撥), 각관(各官)의 관수(官需), 참로(站路)의 지공(支供) 등의 비용으로 쓰게 하되, 각 조항의 일과 물색(物色)에 모두 정가(定價)를 매긴 뒤 일일이 절목을 마련해서 시행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작미(作米)하는 한 가지 일을 혹 기전에만 시행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다른 도에까지 확산시킨다면 분명히 끝에 가서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로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싶다.

조종(祖宗)의 법제를 준수해 가면서 크게 폐단이 되는 것만 제거해 나가면 되지 꼭 변경시키려고 노력할 것은 없다. 혜택을 조금 베풀려다가 큰 근본을 망각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이 공사는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3화약 만들 염초를 궁궐기와에 바름

그리고 화약만들 염초로 기와구운게 광해였죠 광해군일기[정초본] 150권, 광해 12년 3월 21일 기해 4번째기사 1620년 명 만력(萬曆) 48년

“본소(本所)가 청기와 굽는 일을 지금 막 시작했으나 저축되었던 염초가 떨어져서 청기와 만드는 일을 요즘 우선 정지하였습니다.

역관 최흘(崔屹)이 올려보낼 것과 본소에서 따로 준비하기를 기다린 뒤에 즉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청기와 만드는 일을 어떻게 정지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만들도록 하라. 그리고 이 기와는 구워내고 나면 바로 벗겨지고 떨어져 청색이 다 없어져 버리니, 앞으로 금계군(錦鷄君)과 더불어 【금계군은 바로 종실 중에 무식한 사람으로 잡예(雜藝)가 많은 자이다.】 서로 의논하여 정밀하게 만들어서 청색이 벗겨지지 않게 하라.” 하였다

-3)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인조의 공신이었던 이괄이 최전방 전력을 이끌고 (현대로 치면 제7군단)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하여 모두 날려먹고 잔당들이 청나라에 붙어서 호란의 방어가 어려워진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어도 병자호란은 일어날 전쟁이었는데 당시 청나라의 상황을 보면 최대교역국이던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교역이 끊겨버렸고 백성들이 인육을 먹을정도의 엄청난 흉년과 인구증가와 소빙하기 까지 겹쳐버립니다

게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게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누르하치가 죽고 조선을 싫어하는 홍지타이가 칸에 오르게 됩니다

정묘호란으로 조선에게 형제관계와 쌀을 보급받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해지자 군신관계를 거부했다는 명분으로 보급을 약탈하러 조선을 침공한게 병자호란입니다

-4)임진왜란 영웅들을 숙청함

고언백 장군


왜란 당시 평양탈환 등의 전공을 세워 제흥궁 이라는 공신까지 봉해졌던 고언백 장군
​임진왜란이 나던 해 신립,권율 휘하 장수로 싸워 총 257회에 걸쳐 왜적과 싸웠다

​광해군의 임해군(광해군에 의해 죽은 광해군의 형, 이 사람이 진짜 역모인지 아닌지는 불명) 추국 당시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추국청에 불려왔다

​고언백은 1599년 경기방어사가 되었을때 임해군에게 한번 가서 인사를 했는데

​ 그 뒤 임해군이 환도를 구해달라고 부탁 했지만 들어주지 않자 이 일로 임해군이 무척 화를 냈기 때문에 다시 만날 일도 없고 친하지도 않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 했다

그러나  임해군의 종 하나가 1607년 잔치때 참석 했다고 진술 하여 곤장과 압슬을 받던 중 사망했다

​훗날 병자호란 당시 이경증 이라는 사람이 ” 고언백이나 한명련 같은 자가 있다면 적진을 돌파하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이라고 말한다 (승장원일기 인조14년 12월19일)

​한명련도 임진왜란 영웅으로 이 사람은 인조때 억울하게 역모죄를 써 진짜로 역모(이괄의 난)에 가담한 사람이다

​선조-광해군-인조 영웅들의 수난시대..
물론 전쟁 끝나고 영웅들 처리 하는건 역사에 자주 나오긴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성계같은 전쟁영웅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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