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건국과 역사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추모鄒牟왕(주몽朱蒙왕)이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기까지 고구려의 이동 과정과 건국 연대를 고찰해 보자.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구려句麗라고도 불렀음이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는 “나라 이름은 고구려라 하고, 그로 인해 고高로써 씨氏를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나라 이름 고구려의 첫 자인 고高는 왕실의 성姓을 의미했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왕실의 성을 제외한 나라 이름은 구려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라 하면 서기전 37년에 요동 지역에서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를 말한다.
『삼국사기』,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지』 「동이전」 등에 보이는 고구려는 바로 이 고구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문헌 기록에 나타난다. 
이 고구려는 서기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와는 달리 오늘날 북경 근처 난하 유역에 있었다.

위의 두 고구려는 존재 시기와 지리적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난하 유역에 있었던 고구려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요하 동쪽에서 건국된 고구려는 독립국이었다.

이 이름이 오늘날 요서 서부 난하 유역에서 오늘날 요동 지역으로 이동한 시기는 고조선 말기였다.

따라서 이 이름의 이동은 고조선 말기의 상황 및 고조선의 붕괴와 관계가 있었다.
고조선 말기에 오늘날 요서 지역에는 위만조선이 건국되었고 위만조선이 멸망한 뒤 그 지역은 중국 서한의 영토가 되어 그들의 군현인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고조선 말기에 오늘날 요서 지역은 고조선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의 정권을 빼앗아 난하 유역에서 건국한 위만조선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고구려 영역을 침략해 오자 그에 항거하면서 고구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여러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을 것인데 그 가운데 큰 집단들은 이전에 사용하던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여러 곳에 고구려라는 족명族名과 지명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전 37년에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바로 이러한 이동세력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었다.

따라서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난하 유역에 있었던 고구려의 후계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살펴 보는 것은 고구려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고구려의 이동은 자체 문제로 그치지 않고 고조선이 붕괴되고 열국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반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이 고찰은 한국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고구려의 건국

고구려 건국과 연관하여 등장하는 문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건국 연대에 대해 그동안 일부 학자들은 의문을 품어왔다.

그 이유는 옛 문헌에 서기전 37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라는 이름이 보이고 있으며 고구려의 존속 기간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 길었던 것으로 말한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 편에는 서주西周 초기에 서주의 부도副都인 성주成周(오늘날 낙양)에서 개최되었던 성주대회에서 서주 주변의 여러 나라와 종족의 대표들이 참석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 고이高夷가 보인다. 
그리고 고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고이는 동북의 이夷로서 고구려이다.”라고 했다.

이 주석에 따르면 고구려는 중국의 서주 초기인 서기전 12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상서尙書』 「주관周管」편에는 “무왕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와서 축하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공안국孔安國이 주석하기를, “해동의 여러 이족夷族은 구려(고구려)·부여·한·맥 등과 같은 족속인데 무왕이 상商을 이기니 모두 길이 통했다.”고 했는 바 이 기록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중국의 서주 무왕 때 이미 고구려는 중국의 서주 왕실과 왕래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서주가 건국된 서기전 12세기 무렵에 고구려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게 해준다. 
중국의 서주시대(서기전 1046~서기전 771년)는 고조선시대(서기전 2333년~서기전 1세기)에 해당한다. 이 고구려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서기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와는 성격이 다른 고구려로서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그리고 『한서』 「지리지」에는 고구려 건국 연대인 서기전 37년보다 앞서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서기전 107년에 설치한 현도군 안에 고구려현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런 기록들은 고구려라는 이름이 서기전 37년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서기 668년(보장왕 27년)에 멸망하여 705년 동안 존속했는데 『당회요唐會要』에는 『고구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가 천 년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고구려의 역년歷年이 천 년 가까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는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친 상황에 대한 설명에서 『고구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중국의 한漢시대에 이미 나라로서 존재했고 900년 동안 존속했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본기」 <문무왕 10년>조에 실린 문무왕이 고구려 고안승高安勝에게 내린 책명문冊命文에 고구려 역년이 거의 800년이 되려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본기」 말미의 사론史論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진·한시대에 이미 있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서기전 3세기 말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이 된다.

이상의 문헌들은 고구려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건국 연대인 서기전 37년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존재했고 그 존속 기간도 705년보다 훨씬 긴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 때문에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이라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학자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3세기 무렵으로 올려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고조선의 붕괴와 고구려의 건국을 합리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게 된다. 

고조선의 뒤를 이은 열국 가운데 일찍 건국한 동부여·신라·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서기전 59년·57년·37년으로 확인됨으로써 고조선의 붕괴 시기가 서기전 1세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서기전 3세기에 건국되었다면 고조선이 존재한 상황에서 고조선 영토 안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것이 되어 그 건국 과정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합리화하려면 고조선의 붕괴 연대를 서기전 3세기로 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동부여와 신라의 건국 연대와 고조선 붕괴 연대 사이에 너무 많은 시간차가 있어서 이들의 건국 과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분명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부인하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등장한다.
첫째, 한국이나 중국의 여러 문헌에 고구려의 존속 기간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705년보다 길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구려가 서기전 37년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존속 기간에 대한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그 건국 연대나 존속 기간을 정확하게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37년, 존속 기간을 705년이라 기록하면서도 고구려의 존속 기간을 800년 또는 900년이라고 말한 다른 기록들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기록과 인용한 내용이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건국 연대와 존속 기간, 다른 문헌들에 보이는 고구려의 존속 기간을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즉 서기전 37년은 고조선이 붕괴된 뒤 독립국으로서의 고구려가 건국된 연대이고, 그보다 앞서 있었던 고구려와 705년보다 길게 존재했던 것으로 표현된 고구려는 고조선의 거수국 고구려와 그 연대까지를 포함한 고구려의 역년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고구려 건국 당시 건립된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추모왕이 22세 때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沸流라는 강가의 홀본忽本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기록하였고,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에도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망명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는 동부여에서 망명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들 기록에서 동부여 건국 연대인 서기전 59년, 고구려 건국 연대인 서기전 37년, 그리고 건국 당시 추모왕 나이 22세라는 3가지 기록을 서로 비교했을 때 추모왕은 동부여가 건국되던 해에 출생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추모왕은 동부여를 건국한 해부루왕이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금와왕 때에 출생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추모왕이 금와왕 때 태어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무시하고 추모왕이 동부여 건국 초에 출생했다고 보더라도 건국 초의 동부여 사회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텐데 유화부인과 추모왕을 거두어 왕실에서 생활하도록 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점들로 보아 추모왕이 망명하기 전에 살았던 곳은 동부여라기보다는 북부여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광개토왕릉비문」과 「모두루묘지」에는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고구려 당시의 기록으로서 『삼국사기』보다 사료로서 가치가 더 높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온 이주민 집단이 건국했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북부여에서 이주한 추모왕이 서기전 37년에 오늘날 요동에서 건국한 고구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등에 보이는 고구려로서 오늘날 평안북도와 남만주의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3. 고구려의 원위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고구려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주서』 「왕회해」편에는 서주 초에 성주(오늘날 낙양)에서 개최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주가 건국된 지 오래지 않아 서주 무왕이 사망하고 나이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이 보좌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무왕의 다른 동생들과 상商나라의 왕자가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을 ‘삼감三監의 난’이라 하는데 주공 단은 난을 평정한 뒤 동방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도읍인 호경鎬京보다 동쪽의 낙읍洛邑에 부도副都로서 성주를 건설하고 성주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되어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太公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공 망은 주족周族이 상나라를 칠 때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워 제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그가 참석했던 것으로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11세기 무렵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상서』 「주관」편 공안국의 주석에 따르면 중국의 서주 무왕 때 이미 고구려는 중국의 서주 왕실과 왕래했다.
이 기록은 서주가 건국된 서기전 12세기 무렵에 고구려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의 서주시대는 고조선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분명히 『삼국사기』에서 말한 서기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와는 다른 성격의 고구려로서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것이다.

황하 중류 유역의 성주에서 열린 회합에 고구려 대표가 참석했다면 당시에 고구려는 황하 중류 유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들은 한결같이 고조선시대의 고구려가 오늘날 요서 서부 난하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 <고조선>조는 당나라의 『배구전裵矩傳』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있던 곳은 원래 고죽국이 있던 곳인데 서주시대(서기전 1046~서기전 771년)에는 기자가 망명하여 거주하면서 기자조선(서기전 1100 무렵~서기전 195년)이라 했고 서한시대(서기전 206~서기 8년)에는 한사군(서기전 108~서기 313년)을 설치했다고 말하고 있다. 배구는 수나라와 당나라 두 시대에 걸쳐서 살았던 인물인데, 『수서隋書』 「배구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고구려·고죽국·기자조선·한사군은 모두 같은 지역에 있었다.

기자가 봉해졌던 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었던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었더 지명이다.
그곳은 뒤에 한사군이 설치됨에 따라 낙랑군의 조선현이 되었다. 그리고 고죽국도 난하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고죽국·기자조선·한사군은 그들이 차지한 면적이나 중심부는 일치하지 않았지만 난하 유역의 대체로 같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독립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원래 위치했던 곳은 오늘날 북경 근처 난하 유역이었던 것이다. 이 고구려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서주 초기인 서기전 12세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면 고구려는 고죽국·기자조선 등과 상당히 오랫동안 공존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죽국은 중국의 상시대(서기전 1600년 무렵~서기전 1046년)부터 춘추시대(서기전 770~서기전 403년)까지도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며(『관자管子』 「소광小匡」편), 기자조선은 서기전 12세기 무렵부터 서기전 2세기 초(서기전 195년)까지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원주지原住地가 고죽국이나 기자조선과 같은 수는 없으며, 이들은 서로 인접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뒤를 이은 위만조선과 그 뒤를 이은 한사군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앞에서 인용된 문헌들에는 위만조선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의 뒤를 이어 건국되었고 위만조선이 멸망한 뒤 그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므로 기자조선과 한사군 사이에는 당연히 위만조선이 존재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만이 서기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통치자였던 준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한 뒤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날 난하부터 대릉하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한 무제에게 위만조선이 멸망된 뒤 그곳에는 서한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기에는 고죽국과 고구려의 원주지가 모두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영역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국 당시대(618~907년)의 상황을 기록한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괄지지括地志』, 『통전通典』 등에도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난하 유역에 있었고, 고구려의 평양성과 한사군의 낙랑군은 같은 지역에 있었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은 위만조선의 왕검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왕검성王儉城을 왕험성王險城이라 표기했다. 
왕검성은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왕검성은 고조선의 도읍지로 잘못 알고 있는가 하면 평양성을 대동강 유역에 있는 오늘날 평양으로 보고 한사군의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 기록에 나오는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었다.
즉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바다를 건너야 신라나 백제에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서 신라나 백제에 이르는 사이에는 바다가 없다.
그러므로 위 기록에 나오는 평양성이나 낙랑군의 위치는 대동강 유역일 수가 없다

위 내용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위치는 발해 서북부밖에 없다. 그곳은 오늘날 요서 서부 변경으로서 난하 유역이 된다.

위 기록들은 모두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과 한사군의 낙랑군 위치가 오늘날 난하 유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앞에서 확인된 고구려의 원주지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그것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동이열전」 <고(구)려전>에 기록된 고구려의 평양성은 어느 시기의 평양성인가 하는 점이다.

위 『구당서』와 『신당서』의 내용은 서기전 37년에 독립국으로 출발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이는 평양성의 위치는 당나라 시기의 상황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즉 고구려는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건국된 뒤 차츰 영토를 넓혀 오늘날 요서 지역을 수복하고 난하 유역의 옛 고구려 땅에 있었던 평양성을 재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고구려의 이동

『삼국사기』,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지』 「동이전」 등에 보이는 고구려는 서기전 37년에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건국된 나라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이와는 성격이 다른 고구려가 난하 유역에 존재했는데 그것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음도 확인했다.

그렇다면 고구려라는 이름은 어떤 연유로 난하 유역에서 오늘날 요동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이 두 고구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점을 밝히기 위해 우선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가 독립국으로 출범하던 서기전 37년 전후의 만주 지역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건국된 서기전 37년 무렵에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부여·고구려·읍루·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한·신라 등이 있었고 오늘날 요서 지역에는 서한의 낙랑군과 현도군이 있었다.

오늘날 요서 지역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로서 부여·고구려·기자조선 등을 비롯한 고조선의 여러 거수국들이 그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 서한에서 기자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오래지 않아 기자조선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했다. 기자조선은 오늘날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었으므로 위만조선도 이와 같은 곳에 있었다. 

그 후 위만조선은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 오늘날 대릉하 유역까지 차지했다.

서기전 108년에 이르러 서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낙랑·진번·임둔 등 3군을 설치했고, 1년 뒤인 서기전 107년에는 앞의 3군보다 동쪽인 오늘날 요하 서부 유역에 현도군을 설치했다.
이렇게 되어 한사군이 되었다. 그 결과 고조선은 오늘날 요서 서부 지역 전부를 잃어 버렸다.
그러나 한사군은 유지가 어려웠다. 고조선의 반격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둔군과 진번군은 설치된 지 26년 만인 서기전 82년(서한 소제 시원 5년)에 폐지되고 낙랑군과 현도군만 남게 되었다.

이런 상황 변화가 있는 가운데 기자조선 가까이 있었던 고구려는 위만조선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 영토를 잃게 되었다.
고구려의 지배층과 일부 주민들은 위만조선에 대항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고구려족 모두가 한 곳으로 이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큰 집단은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원주지에서도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 고구려라는 이름이 여러 곳에 존재하는 상황이 벌이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옛 문헌 기록과 현존하는 지명에서 발견된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일명 맥貊(또는 맥이貊夷)이라고 하며, 갈라져 나간 종족으로 소수맥小水貊이 있다고 했고,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에도 구려는 대수大水에 거주했고 구려에서 갈라져 나간 종족은 소수에 살면서 맥궁貊弓이란 좋은 활을 생산하는 소수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소수맥이란 명칭은 그들 자신보다는 중국인들이 부른 명칭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인들은 고구려나 구려라는 이름이 있는데 맥이라는 다른 종족의 이름을 사용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예부터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을 통칭하여 맥이나 만맥蠻貊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위 『삼국지』 내용은 적어도 2개의 고구려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나는 대수에 의지해 나라를 세운 고구려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에 의지해 나라를 세운 고구려이다.
소수는 요동군 서안평현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렀다고 했다.

그런데 대수에 의지해서 건국한 고구려가 요하 유역에서 건국한 고구려를 의미한다면 소수는 요하보다 작은 강이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소수를 오늘날 요동에 있는 혼강渾江이나 장전하長甸河 또는 태자하太子河 등으로 보기도 하고,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오늘날 단동丹東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요동군은 행정구역으로서 일반적 의미의 요동과는 다른데 고대의 요동군은 오늘날 난하 하류 유역으로서 갈석산 서쪽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소수나 서안평현은 오늘날 요동에 있었을 수 없으며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원위치는 난하 동부 유역으로서 고조선 영토였다. 그런데 소수맥이 거주했던 곳은 요동군 서안평현 지역이었는데 요동군은 전부터 중국의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므로 소수맥이 거주했던 곳은 고구려의 원위치에서 가까운 곳이기는 했지만 원위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 고구려인들은 중국 영토 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요동군 서안평현은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중국의 행정구역으로서 국경지대에 있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그 동쪽에 있었고 위만조선이 멸망된 뒤에 위만조선 지역은 중국 영토가 되어 한사군이 되었다.
그러므로 소수맥이란 불린 고구려인들이 살고 있었던 서안평현 부근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서한의 황위를 찬탈하여 신新(8~23년)을 건국한 왕망이 흉노를 치기 위해 소수맥이라 불리는 고구려족 병사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은 소수맥이라 불렸던 고구려족이 왕망 시대에 중국 영토 안에 거주했으며 그곳은 국경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위의 사실을 뒷받침한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을 왕망이 오늘날 요동에 있었던 고구려국 병사를 동원하여 흉노를 치려 했던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고구려나 구려라는 이름을 모두 같은 정치집단에 대한 칭호로 잘못 인식했기 때문에 비롯 된 것이다.
오늘날 요동에서 건국한 고구려국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으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왕망이 고구려국의 군대를 동원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위에서 확인한 고구려와는 다른 또 하나의 고구려가 보이는데 그것은 한사군의 현도군에 속해 있었던 고구려현高句麗縣이다. 이 고구려현은 옛날의 구려 오랑캐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 기록은 현도군의 고구려현은 고구려족이 거주했던 곳에 설치되었거나 고구려족의 일부를 이주시켜 그곳에 살게 하고 그 지역의 이름을 고구려현이라 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현도군은 한사군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오늘날 요하 서부 유역에 있었으므로 현도군에 속해 있었던 고구려현의 위치도 요하 서부 유역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현의 위치는 소수맥이라 불린 고구려족의 거주진이 난하 유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곳은 또 하나의 고구려족 거주지였던 것이다.

고구려족의 또 다른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현존하는 지명에서도 확인된다. 오늘날 요령성 남부 해안 지역 수중綏中과 전위前衛의 중간 지점에는 고려하高麗河라는 강이 있고 그 유역에는 고려성지高麗城址가 있다. 이런 이름들이 남아 있는 것은 그 지역에 고구려족이 거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오늘날 요하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현도군의 고구려현 지역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요동군의 동부 경계인 갈석산에서도 동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어 소수맥이라 불린 고구려족이 거주했던 곳으로 볼 수도 없다. 

이곳은 또 다른 고구려족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족의 거주지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것은 위만조선의 영토 확장 및 한사군 설치에 따른 주민 이동과 고구려족의 세력 성장을 막기 위한 중국의 분산 정책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상의 고구려족 거주지들은 오늘날 요서 지역에 위치했는데 이 지역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으나 고조선 말기에 위만조선의 영토가 되었다가 서한의 영토에 편입되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는 고조선이 붕괴된 뒤 서기전 37년에 고구려라는 독립국이 출현했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이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이주한 추모왕이 건국했다.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출생했지만 부여족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였고 아버지는 스스로 해모수라 칭했다. 

해모수는 ‘해머슴아’ 즉 일자日子라는 뜻으로 고조선의 단군을 해모수라고도 불렀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단군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알게 해준다.

고조선시대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초기에는 고구려족 출신이 거수를 맡았으나 뒤에 단군의 후손으로 교체되었다. 혈연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통해 볼 때 추모왕이 해모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그가 단군의 후손인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렇게 때문에 추모왕은 그가 건국한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 했던 것이다.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그곳에는 졸본부여가 있었는데 그가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바꾼 것은 추모왕 자신을 포함한 건국의 주도세력과 그 주민들 대부분이 고구려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서기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는 이전에 난하 유역에 있었던 고구려 세력이 이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건국된 지역에는 졸본부여의 부여족과 그 이전부터 그곳에 거주했던 토착인들이 혼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옛 문헌에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이라고 말한 것은 고구려족이 부여족에서 갈라져 나오는 같은 혈통이라는 뜻이 아니라 추모왕이 한때 북부여에 의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구려의 주민 가운데 부여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5. 마치며

고구려라는 이름은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이 고구려라는 독립국을 건국하기 전부터 존재했다. 중국 문헌에서는 고구려가 서기전 12세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고구려는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고죽·기자조선 등과 인접하여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 위만이 서한에서 고조선의 서부 변경으로 망명하여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의 준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하고 그 영토를 오늘날 대릉하 유역까지 확장했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의 지배층과 일부 주민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족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서기전 108년에 서한에게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에 서한의 군현인 한사군이 설치되었는데 이 시기에 서한은 고구려족을 약화시키기 위해 원주지에 남아 있던 고구려족을 분산 이주시켰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고구려족은 또다시 여러 곳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여러 곳으로 이주한 고구려족 가운데 큰 집단은 고구려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요서 지역에는 고구려라는 이름이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오늘날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수맥이라 불린 구려족句麗族, 오늘날 요하 서부 유역으로 추정되는 현도군의 고구려현, 오늘날 요령성 남부해안 수중과 전위 사이에 있는 고려하와 고려성지 등은 바로 그런 연유로 고구려족이 남겨놓은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이름들은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중국 영토에 편입되었던 오늘날 요서 지역에 남겨진 고구려의 이름이었는데 이와는 달리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는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이 독립국 고구려를 건국했다.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이주해 왔지만 부여족은 아니었다.

추모왕의 아버지는 스스로 해모수라 했는데 아마도 추모왕은 단군 후손인 고구려 거수의 혈통일 것이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한 것도 이전의 고구려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해 준다. 
추모왕의 조상과 일족은 위만조선의 영토 확장으로 그들의 거주지를 잃게 되자 잠시 북쪽의 북부여에 의탁하고 있다가 오늘날 요동으로 이주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던 것이다.

고구려 건국에는 추모왕을 포함하여 고구려족이 주체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 건국된 고구려국의 영토 안에는 부여족과 그 이전부터 그곳에 거주했던 토착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옛 문헌에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이라 기록한 것은 추모왕이 한때 북부여에 의탁했고 고구려의 주민 가운데 부여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는 705년 동안 존속했다.
그런데 옛 문헌에는 고구려가 이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존속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은 추모왕이 건국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3~2세기 무렵으로 올려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고조선 붕괴 연대와 고구려 건국 연대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구려는 그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존재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존속 기간을 705년보다 길게 말한 것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까지를 포함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역년을 대개 800~900연 년으로 말하고 있는데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는 고조선 초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800~900여 년이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기전 4~3세기 무렵의 고조선 말기에 단군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거수국들이 반독립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는데 이때 고구려도 반독립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반독립국이었던 서기전 4~3세기 무렵부터 고구려의 역년을 계산하면 800~900여 년이 된다.

아래 지도는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5세기 후반의 고구려 영토를 나타낸 것이다.

고구려 건국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고구려 영토 확장은 2019. 10. 29에 새샘블로그에 올린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6―고구려의 중국 요서 지역 진출’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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