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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1. 들어서면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지성’이라는 정신적 능력을 포섭했다는 데 있다.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은 인류가 이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룬 최고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실로 양자역학의 깊이와 넓이는 동서양의 주요한 철학적 성찰을 아우르면서 가장 미시적인 소립자의 세계로부터 가장 웅대한 우주론에 걸쳐 적용될 정도로 심오하고 방대하다.

또한 유리창을 통과하는 빛과 전선을 따라 흐르는 전류와 같은 극히 일상적인 현상으로부터 자연계의 궁극적 본질을 파헤치는 데까지 동원되는 최선의 이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장 적절하게 말한다면 양자역학은 하나의 단순한 학문 체계라기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야 할 보편적 세계관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근본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수학 및 물리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로부터 소외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역설적 현상이 지속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유수의 저술가들이 양자역학의 주요 면모를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쓰려고 꾸준히 노력해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이나 영국의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 등은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대표적 석학들이다. 또한 이밖에도 양자역학과 직간접으로 관련하여 다양한 책들이 나와 있으므로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양자역학의 여러 원리들 가운데 ‘이중성원리’를 약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이 원리에 대한 기본적 이해의 틀을 얻고 몇 가지의 근본적인 의문점에 관해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 양자역학 이중성원리의 성립 과정

이중성원리(二重性原理 duality principle)는 “모든 물질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가진다”는 원리를 말한다.

빛의 이중성

이중성원리는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 1858~1947)의 선언, 즉 “에너지도 낱개의 단위로 되어 있다”는 말에 내포된 암시의 필연적인 구체화이다. 그리고 라는 플랑크 식에서 빛의 에너지가 주인공이듯 “이중성원리가 확립되기까지의 역사는 주로 빛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빛은 너무 흔한 일상적 현상이어서 평소에는 별로 주목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처럼 위대한 신비도 다시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다. 이 점은 과학적 관점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따르면 창조의 첫날 신은 “빛이 있으라”는 명령을 내려 빛을 가장 먼저 만들었는바, 인간에게 내려진 최초의 신비라 할 수도 있다. 이후 빛은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각에 작용하며, 세상을 광명과 암흑으로 나눈다는 등의 강렬한 상징성에 힘입어 우리 마음속에 항상 가까이 자리 잡아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빛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빛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해명은 아주 늦게 시도되었다. 이는 물론 그 해명에 필요한 과학적 기초가 17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한번 제기된 뒤에는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이는 동시대인이었던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입자설과 파동설을 각각 주장한 데서 유래한다.

이 가운데 처음 100여 년 동안에는 뉴턴의 위명에 힘입어 입자설이 파동설을 압도했다. 그러나 1801년에 영(Thomas Young, 1773~1829)이 이중슬릿실험(double slit experiment)을 통해 파동설을 강력히 옹립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1) 그리고 1870년대에는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유명한 ‘맥스웰 방정식’을 발표하여 파동설을 수학적으로도 확고한 기초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사실상 입자설에 대한 결정타와도 같았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이 방정식을 배우면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존경의 표시로 그의 방에 걸어놓은 3인의 과학자 초상 중에 맥스웰을 포함시켰는바 – 다른 두 사람은 뉴턴과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였다 – 이쯤에서 빛의 본질에 관한 지루한 대립은 파동설의 승리로 끝장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맥스웰의 파동설을 혁파하고 빛의 본질을 새롭게 규명한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1905년에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에 관한 논문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입자설을 되살렸고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 이 공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광전효과는 이름이 말하듯 “빛(광)을 금속에 쪼였을 때 전자(전)가 튀어나오는 현상(효과)”를 가리킨다.2) 여기서 신기한 것은 빛의 진동수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어야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게 신기하다는 것은 파동설의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기는 아주 곤란하다는 뜻이다. 이 상황은 전자라는 작은 구슬이 많이 담겨 있는 상자에 ㉮ 물을 쏟아 붓는 것과 ㉯ 전자보다 좀 큰 조약돌을 톡톡 던지는 것을 비교한 아래 그림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림1. 광전효과의 비유: 구슬이 담긴 상자는 금속, ㉮ 물을 쏟아 붓는 것은 물결에서 유추할 수 있듯 빛을 파동으로 보는 경우, ㉯ 전자보다 좀 큰 조약돌을 톡톡 던지는 것은 빛을 입자로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때 ㉯의 경우가 전자의 방출에 더 효율적이라는 점은 직관적으로 명백하다.

위 그림이 잘 보여주듯, 광전효과는 빛을 개체성이 없는 파동보다 낱낱의 개체성이 뚜렷한 입자로 볼 때 더 쉽게 설명된다. 그리고 전자를 퉁겨내는 데는 투입하는 에너지의 ‘총량’이 아니라 ‘개개의 양’이 더 중요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빛 에너지의 단위체’를 광량자(light quantum)라고 불렀다. 그런데 광전효과의 해명으로 입자설이 부활했으나 파동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파동설 또한 나름대로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 분야에서는 입자설보다 우월한 설명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이중성을 띤다”는 ‘빛의 이중성’을 ‘광량자’라는 개념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로써 빛의 본질에 대한 200여 년의 논쟁은 드디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3)

전자의 이중성

빛의 이중성에서 싹튼 이중성원리는 전자의 이중성으로 완성되었는데, 그 주역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브로이(Louis Victor De Brogile, 1892~1987)였다. 그는 종래 파동으로 알았던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진다는 점을 거꾸로 해석하여 그때까지 입자의 집합으로만 여겼던 각종 물질도 근본에 있어서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띨 것이라 추측했으며, 이를 토대로 1924년에 다음과 같은 매우 간단한 식을 제시했다.

lambla = frachbarp

여기서

lambla는 물질의 파동성에 따른 물질파(material wave)의 파장,

frachbarp는 플랑크 상수,

는 물체의 운동량이다. 그런데 본래 파장은 파동의 고유한 성질이고 운동량에 들어 있는 질량은 입자의 고유한 성질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이 두 가지는 서로 전혀 무관한 개념이었는데 이 식에 의하여 등호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드브로이의 주장은 1927년에 실험적으로 확인되었고, 다음과 같이 1925년부터 이론적으로 확립되어가던 양자역학의 제1가정으로 편입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양자역학의 제1가정: 모든 물리적 계는 고유의 파동함수로 나타내진다.

이중성원리의 역사적 요약

역사적으로 볼 때 물질의 이중성은 빛의 본질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하여 전자의 회절실험에 의하여 확증되었는데 서로 대조적인 길을 갔다. 즉 빛은 대략 ‘파동성→입자성’을 거쳤다고 볼 수 있음에 비하여, 전자는 ‘입자성→파동성’을 거쳐서 그 이중성을 인정받았는바, 아래에 이 과정을 표로 요약했다.

3. 이중성원리의 이해

이상 이중성원리의 성립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중성원리는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대조적인 두 개념을 융합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선명한 직관적 이해를 얻기 어렵다는 사실로 악명(?)이 높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의 대가들마저 “양자역학을 이해한다고 하는 사람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파인만)라고 말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말들은 양자역학에 대한 흥미를 북돋워주는 한편 겸허하고도 진지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긍정적 취지를 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경향이 지나쳐 맹목적인 신비화를 초래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게도 한다. 과학사를 돌이켜볼 때 한동안 불가사의한 신비로 여겨지던 현상들이 나중에 깨끗이 해결된 사례는 매우 많으며, 양자역학의 신비도 언젠가 이와 같이 해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친 낙관론과 비관론을 동시에 경계하면서 올바른 관점을 찾아 계속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아래에서는 비록 완전한 해결은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유용한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보기로 한다.

이중성원리의 난해성


이중성원리의 직관적 이해를 얻기 위한 전 단계로 먼저 그 난해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입자’라는 개념이 상당히 모호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수학적으로 볼 때 파동은 삼각함수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주기함수를 이용하면 매우 정교하게 표현된다. 실제로 양자역학의 한 형태인 파동역학(wave mechanics)은 이러한 수학적 뒷받침에서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입자에 대해서는 파동에 맞먹을 정도의 명확한 표현 수단이 없다. 다시 말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껏 ‘입자’라는 개념은 오직 우리의 직관에 의존할 뿐 그 어떤 명시적 정의도 갖지 못하는 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중성원리의 난해성에 대한 주요 원인으로 여겨지는바, 아래서는 입자성에 대한 2가지의 주요 관점을 점검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데모크리토스적 입자성

양자역학은 대개 1900년에 발표된 플랑크의 연구를 그 효시로 본다.5) 하지만 이중성원리를 인정하는 이상 그 연원은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BC460?~37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라는 관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을 제창한 배경은 아주 흥미롭다. 우선 이들보다 앞선 사람으로 알려진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515?~445?)는 이른바 일원론(monism)을 주장했다.

그는 우주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존재이며,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불생불멸·불가분·불변부동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파고들면 논의가 상당히 복잡해질 것이므로 이 과정은 생략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뭔가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해보았던 경험이 있다.

데모크리토스라고 해서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이해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데모크리토스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존재와 현상을 현실적으로 설명하기에 일원론은 역시 역부족이고 그와 다른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하여 데모크리토스가 내세운 핵심적 개념은 바로 ‘진공’과 ‘원자’였는데, 그의 주장은 ‘사과 자르기’의 비유를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칼이 사과를 자를 수 있는 이유는 사과라는 물질 사이에 빈 공간이 있고 그곳을 칼날이 지나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사과라는 물질은 진공 속에서 존재하며, 칼이란 물질은 그 속에서 운동한다. 이처럼 진공은 물질이 존재하고 운동하게끔 하는 실체적 존재이다.

다음으로 그는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칼로 사과를 자르는 과정이 무한히 되풀이될 수는 없다고 추론했다.

만일 이 과정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물질은 단순히 진공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며, 그럴 경우 다시금 파르메니데스 식의 일원론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어느 단계에선가 더 이상 잘라지지 않는 최소의 단위체, 즉 원자라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데모크리토스의 관점에 따를 때 원자라는 입자는 최고의 경도와 명확한 경계를 가진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칼이라는 자르기 도구는 이론상 어떤 물질로도 만들 수 있는데, 그 어떤 물질로도 자를 수 없으려면 원자는 최고의 경도를 지녀야 한다.

또한 그 경계도 명확해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가상의 칼날이 그 모호한 경계를 지나면서 또다시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대 원자론은 순수한 형이상학적 추론에 의해서 나왔지만 “뜬 구름 잡기” 식의 허황된 논리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규정된 입자, 즉 ‘자르기’라는 관념으로부터 유래된 입자는 현실적 입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늘날의 양자역학에 따르면 지금껏 알려진 기본입자로서의 소립자들은 경도라는 속성으로 분류되지도 않으며 분명한 경계를 갖는 것도 없다.

양자역학

그러므로 데모크리토스의 논리에서 기본입자라는 것이 존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점까지는 수긍되지만 그로부터 얻어지는 입자성은 다른 관점에 의하여 적절히 수정되어야 한다.

양자역학적 입자성

고대 원자론으로부터 2천여 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제기된 양자역학에서의 입자는 ‘자르기’가 아니라 ‘측정’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즉 양자역학에서도 불가분성을 기본입자의 본질적 속성 가운데 하나로 보기는 하지만 이때의 불가분성은 물리적인 자르기가 아니라 ‘관측되는 최소단위’라는 점에서 불가분성이다.

양자역학이 이런 관점을 취함에 따라 얻게 되는 입자의 새로운 특성으로서 중요한 것은 입자가 굳이 ‘명확한 경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껏 알려진 모든 소립자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크기’라는 관념을 결부시킬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원자의 크기는 대략 1Å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여 분자나 결정을 이룬 상황에서 원자들 사이의 거리를 기준으로 정한 것일 뿐 원자 하나의 경계를 직접 재서 얻은 수치가 아니다. 그리고 원자보다 10만분의 1 정도라고 하는 원자핵의 크기도 알파선의 산란실험에서 얻어진 측정치인데, 만일 충돌하는 입자의 에너지를 높일 경우 이 측정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자꾸만 더욱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건설하여 충돌하는 입자의 에너지를 계속 높이는 것은 여러 소립자의 더욱 깊은 곳까지 탐색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소립자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으므로 여러 여건이 닿는 한 앞으로도 이런 노력은 꾸준히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6)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이런 뜻에서의 입자성은 거기에 파동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데모크리토스의 논리로부터 자연에 최소단위체로서의 입자가 존재할 필요성은 수긍했다.

하지만 이 입자의 불가분성이 ‘자르기’가 아닌 ‘측정’으로 이해되는 한 거기에는 ‘크기’나 ‘경계’라는 관념이 결부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본입자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남은 선택은 자연스럽게 파동성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크기도 형체도 없는 기본 단위체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신호’를 내보내야 하며, 그 방식으로 가장 단순하고 동시에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직관에 그런 대로 잘 부응하는 것은 바로 파동이란 뜻이다.7) 이런 이유에 따라 입자는 궁극적으로 ‘에너지를 담은 파동적 단위체’로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전 자연계는 다시금 진공으로 환원되고 만다.

나아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기본입자의 입자성이 오직 측정에서만 드러난다는 사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8) 만일 기본입자가 측정뿐 아니라 그 전에도 입자로서 행동한다면 이중성원리라는 것은 애초부터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양자역학적 입자성의 측정 관련성’은 기본적으로 이중슬릿실험으로부터 얻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중슬릿실험의 경우 ① 스크린에서 광자를 검출하면 회절무늬를 얻지만 ② 두 슬릿의 바로 뒤에서 검출한 결과들을 서로 합치면 회절무늬를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①에서는 하나의 광자가 파동으로 행동하여 두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면서 회절을 일으킨 후 스크린에서 ‘측정’되므로 수많은 광자가 누적되면 회절무늬가 나타나지만 ②에서는 온전한 하나의 입자로 하나의 슬릿만 통과하는 경우에 대한 측정이므로 이 결과를 아무리 모아도 파동성에 따르는 회절무늬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기본입자의 존재적 파동은 전체로서 하나이고 이 단일성은 측정에서의 입자성으로 드러난다.

4. 마무리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발된 지금까지의 최신이자 최선의 물리학이다. 하지만 물리학도 기본적으로 논리적 성찰의 한계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볼 때 진정한 연원은 아득한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최초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적어도 근본 단위체가 존재할 필요성을 밝혔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단위체는 데모크리토스적인 입자성을 갖지는 못하며 이에 따라 양자역학적인 새로운 입자성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동성과 결합한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종래 거의 모든 자료들이 이중성원리를 겉보기의 ‘모순적 결합’으로 이야기하고 이 때문에 지나친 신비화의 경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벗어나 내면적 필연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이 방향을 취할 때, 비록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는 “과연 자연계는 궁극적으로 연속체일까 이산체일까?”라는 해묵은 문제가 여전히 가로놓여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현대사회가 급속히 디지털화되고 이에 따라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가 우주의 궁극적 실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서 이 의문은 더욱 실감이 난다. 어쩌면 이중성원리가 입자성과 파동성의 모순적 결합이란 점에서 볼 때 언젠가 자연은 ‘이산적 연속체’ 또는 ‘연속적 이산체’와 같은 또 다른 모순적 결합이라는 본질로 파악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이중성원리의 신비도 명확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1) 이중슬릿실험은 단순하면서도 내용은 매우 풍부한 실험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특히 파인만은 이 실험에 양자역학의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강조했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장난감처럼 쓰이는 레이저 포인터를 이용해서 누구나 쉽게 해볼 수 있다.

2) 빛의 일종인 엑스레이(X-ray)는 빠른 속도의 전자를 금속에 부딪쳐서 얻는다. 이런 점에서 엑스레이는 ‘전광효과’라고 부를 수 있다.

3) 여기서 빛의 에너지에 대한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미묘한 견해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플랑크는 빛의 에너지가 어떤 최소 단위의 자연수배라는 단순한 양자화에 머물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빛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실제로 ‘구슬과 같은 덩어리’로 행동한다”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플랑크의 견해는 ‘추상적 양자화’, 아인슈타인의 견해는 ‘실체적 양자화’라 볼 수 있다.

4) Arthur Beiser, Concepts of Modern Physics, 71p. 단 대개의 자료에는 미국의 물리화학자인 루이스(Gilbert Newton Lewis, 1875~1946)가 1926년에 처음 고안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기이한 우연은 루이스의 가운데 이름이 ‘뉴턴’이란 점에 여전히 내재해 있다.

5) 구체적으로 이 연구를 발표한 1900년 12월 14일을 ‘양자역학의 생일(the birthday of quantum mechanics)’로 본다.

6) 입자가속기의 에너지가 높아질수록 소립자의 더욱 깊은 곳까지 침투할 수 있고 이로부터 점점 더 무거운(에너지가 큰) 소립자들이 계속 발견되어왔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소립자의 심연에서 궁극적으로 우주 전체의 에너지와 맞먹는 입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보고 이것을 코스몬(cosmon)이라 부르기도 했다. 물론 이는 아직 허황된 예상이다. 그러나 극미의 소립자 속에 무한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는 생각이다.

7) 이런 뜻에서 파동성은 비유적으로 기본입자의 ‘존재적 몸짓’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8) 이와 관련하여 “빛은 어떤 실험에서는 입자성을 드러내고 다른 어떤 실험에서는 파동성을 드러낼 뿐 두 성질을 동시에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말은 재고해야 한다. 이중슬릿실험에서 보다시피 스크린의 회절무늬는 수많은 광자들이 회절을 겪은 다음 각자의 입자성을 나타낸 것이 전체적으로 회절무늬를 형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떤 측정에서나 개개의 광자는 오직 입자성을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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