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전투 제 1차 여당전쟁

혹시 연개소문이라는 드라마 보셨나요?
2006년에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로 약1년간 방영했습니다.
저도 이때 처음으로 드라마를 보고 연개소문에 대해 알게됬었습니다.
안시성전투와 여당전쟁을 보고 기억에 남아 역사공부할때 조금 수월했던 기억이 있네요
혹시 한국사를 공부하셔야 하는 분들이시라면 역사드라마를 한번씩 보시길 추천드릴께요^^

오늘은 그래서 안시성전투와 여당전쟁편!

우선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당 태조는 수나라의 태원유수, 이연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수나라는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본토 침공 등 여러가지 사업을 무리하게 벌리다가 가뭄과 홍수 등 여러 재해가 잇따라 일어나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안시성 전투

대운하 건설 보시면 매우 큰 규모로 이루어 진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운하 건설을 위해서 인력이 100만이 넘게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연의 둘째 아들인 이세민은 자신의 아버지인 이연에게 ‘수나라는 곧 멸망할테니 다른 세력으로 수나라를 전복하자’라는 식의 제안을 합니다.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다음 왕조인 당 왕조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미 수나라는 국력이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연의 이러한 행동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연이 당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세민은 당나라 황제의 아들답게 당나라의 세력을 휘어잡고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후에 이세민이 당 나라 황제에 등극하여 ‘태종’으로 훗날 기억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세력을 점차 키워가고 있는 ‘돌궐족’이 당태종의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돌궐족의 세력이 너무나 커지자 당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돌궐족을 정벌하러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돌궐족은 당나라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 분해되고 서돌궐과 동돌궐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제 고구려를 생각해 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때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라는 위대한 장수가 존재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왕도 조금씩 견제를 하며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나라와 화친을 맺으면서도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훗날을 도모하려고 했는데 연개소문은 국교를 단절하자고 주장하며 강경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 가능성을 알아보고 국력을 늘리며 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요동성 복원모형이라고 합니다.

천혜의 요새라는 평을 들을정도로 견고하여서 당나라로서는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신라는 백제와 끊임없는 세력싸움을 하면서 동시에 국력을 증가시켰습니다.
신라의 김춘추 장군은 자신들의 국력을 보강해주고 뒤를 봐줄 수 있는 나라로 고구려를 택했고 김춘추 장군이 직접 고구려로 향해서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다고 하고 오히려 잡히기 까지 했는데 신라의 김춘추 장군이 직접 신라 왕과 관료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여서 자신들이 예전에 획득하였던 ‘죽령’이라는 땅을 반환하기로 약속을 하고 신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호위를 붙여서 김춘추장군을 신라로 돌려보내고 있는데 김춘추 장군이 자신들의 군사를 데리고 와서
오히려 고구려 병사를 해하고 신라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고 신라를 멸망시키기로 하는데 이때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서 동맹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서기 644년 이세민은 무려 100만의 대군을 끌어모았다고 합니다. (주력부대 64만/ 선발부대 6만 / 보급부대 30만)

유주에 정예부대 6만을 모으고 총사령관 이적으로 하여금 정예부대와 수십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향해 출발하게 합니다.
이세민은 20만을 이끌고 가고 수군대총관 장량은 약 5만여명의 군사와 500여척의 함대를 이끌고 비사성으로 공격을 감행합니다.

사실상 전쟁은 645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대군이 움직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죠 ^^

위의 사진을 보시면 천리장성을 보실 수 있는데 천리장성을 건설하는데 무려 15년이 넘게 걸렸다고 하는데 너무나 쉽게 당나라 군대에게 함락이 당하고 맙니다.
이 후 전쟁의 경과를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4월 1일  – 이적의 군대가 요동강을 건넙니다.


4월 5일 – 장검의 군대가 건앙성을 공격하고 신성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4월 26일 – 개모성이 함락이 됩니다.


5월 2일 – 장량의 수군이 비사성을 함락시킵니다.


5월 10일 – 태종이 이끄는 주력군이 요동강을 건넙니다.


5월 17일 – 요동성이 함락됩니다.


6월 1일 – 백암성이 함락됩니다.


6월 26일 – 안시성 싸움이 시작됩니다.


7월 22일 – 장량의 수군, 건안성을 공격합니다.


9월 18일 –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가 승리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 당나라는 신무기를 개발하여 군대 전방에 배치하였습니다.
바로 신무기는 ‘포차‘입니다.


위의 사진과 같은 포차가 당나라 군대 전방에 배치가 되어 우리 고구려 군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포차를 가지고 고구려의 성문과 성벽을 공략하려고 꾀하였으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고구려 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실례로 신성이 이러한 포차의 공격에도 끈질긴 저항을 하여서 신성을 지켜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당나라 황제는 신성을 포기하고 그 밑에 위치한 현도성을 공략하게 됩니다.
현도성을 공략한 당나라는 바로 개모성으로 향하여 공략을 시도하였습니다.

개모성에서 고구려 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10여일 간의 전투 후에 ‘강획’이라는 당나라 지휘장수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당나라는 더 많은 군사를 투입하여 개모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제 다음으로 요동성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군은 당나라의 군대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성들을 함락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지원군을 데리고 요동성을 향해 진군하게 됩니다.
요동성은 함락이 되긴 했지만 당나라의 피해가 정말 컸다고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평지지역임과 동시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요동성은 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바로 요동성을 공략하는데 피해가 정말 막심했습니다.

당나라는 평지지형이라 당나라가 보유한 신무기 ‘포차’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공격을 통해 당나라군은 요동성을 함락하게 되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이제 요동성과 개모성 사이에 있는 백암성을 눈독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백암성은 위의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뒤로는 암벽절벽으로 이루어져 강물이 흐르고 있고 성의 문은 서문 하나뿐이고 성벽의 높이도 10m가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군대는 기세를 몰아 총사령관은 서남을 공격하고 당 태종은 서북을  공격합니다.
군사가 이때도 수십만이 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본 백암성 성주가 바로 당 태종에게 항복을 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의외로 손쉽게 백암성이 함락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당나라는 이제 어디로 진격을 할 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식량보급창고의 안전을 위해서 안시성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식량보급창고가 요동성과 안시성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안시성을 함락하지 않는다면 식량보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고구려는 안시성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15만의 군대를 안시성으로 보내고 장기전을 염두에 둔 작전을 짜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고구려 –  말갈 연합군 15만이 안시성을 향하게 됩니다.
이 것이 바로 1차 여당전쟁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당나라에서 안시성으로 보낸 선발대는 안시성의 군사들의 습격에 전멸위기까지 맞이하였으나 오히려 그걸 역이용하여서 고구려군을 전멸시켜버립니다.

한편 차출된 15만의 군대는 안시성 옆에 버티고 있었는데 당나라 군은 안시성과 차출군이 연계작전을 펼칠까 두려워 바로 고구려 지원군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6월 21일부터 6월 23일부터 치뤄진 주필산 전투입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당군의 보급상태가 좋지 않다라고 판단하여 장기전으로 가려고 하였고 당나라군은 연계작전을 견제하며 일망타진을 목적으로 두고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고구려군은 수십만의 당군이 자신들을 포위했을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수십만의 당나라 군사들에게 포위공격을 당해서 1만의 고구려 군이 순식간에 사망하게 됩니다.

고연수는 이후 남은 군을 규합하여 산을 등지고 싸우게 되지만 당나라 군사에게 결국 패배하게 됩니다.
주필산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에 당군은 안시성을 당연하게 공략하게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벽을 무너뜨렸으나 군졸들이 금세 장벽을 복구하고 밤에는 게릴라전으로 인해서 전쟁은 장기전 형상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당 본진은 본국에서 가져온 보급도 점점 떨어져가고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으로 인한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겨울이 다가오기 떄문에 많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당태종은 안시성 앞에서 토산을 쌓아 안시성을 공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토산이 안시성 방향으로 무너지는 등 당 태종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안시성의 성벽과 토산이 이어져서 고구려군이 바로 토산으로 직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4일간의 토산전투를 하게 되는데 토산전투 끝에 고구려군이 토산을 점령하였고 당 태종은 끝까지 전쟁을 해보고자 했지만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서 보급이 떨어져 더이상의 전쟁은 불가능하다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후 당태종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비단 100필을 선물하고 당나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철수하려던 당나라를 고구려군은 바로 공격하였는데 당나라 군대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당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게릴라전으로

당나라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고 합니다.

이상 제 1차 여당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는 성공공식에서 둘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