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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환단고기 이야기 (환단고기와 고구려 시조)


환단고기

의 위대한 업적을 확인하기 위하여『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펼쳐보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건국자는 주몽(朱蒙)이며, 다른 이름으로 추모(鄒牟) 혹은 상해(象解), 중모(衆牟)가 있고,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부른다. 한편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광개토왕비문에는 추모(鄒牟)왕 이다.


추모왕의 이름은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를 잠시 소개하면 광개토왕비문은 고구려인들이 그 시대에 쓴 글 이므로 본래 건국자는 추모이고, 주몽은 중국에서 한자 발음으로 옮겨 쓴 것이며, 동명은 부여의 건국자로서 추모왕과 다르나, 후대 고려시대 사가들이 동명을 추모왕의 이름이나 시호로 혼동했다는 견해가 있다.

일단 이 글에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맞추워 추모(鄒牟)왕으로 한다.


잠시 광개토왕비문을 살펴보면,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오르니 영락태왕(永樂太王) 칭호 하였다.


이 내용은 추모왕이 세상에 있기를 싫어하여 황룡을 타고 승천하셨다는 추모왕 사망 기사의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구등조(二九登祚)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2×9 =18로써 광개토왕이 18세 나이로 왕에 올랐다는 뜻이라고 한다.
구구단을 연상하는 표현이라 신비롭기 마저 하다.

한편 광개토왕은 고구려 시조의 17세손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글의 핵심이다.-


이쯤에서 우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고구려왕 계보를 살펴보자.

환단고기


추모왕의 부친은 해모수 인데, 그는 고구려 왕이 아니므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추모왕 부터 시작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참고로 고구려 시조 부터 광개토왕 사이 왕계보와 촌수(寸數)를 확인해 보았다.


【왕실계보】

1대왕 추모 – 2대왕 유리 – 3대왕 민중 – 4대왕 대무신 – 5대왕 모본 – 6대왕 태조 – 7대왕 차대 – 8대왕 신대 – 9대왕 고국천 –  10대왕 신상 – 11대왕 동천 – 12대왕 중천 – 13대왕 서천 – 14대왕 봉상 – 15대왕 미천 – 16대왕 고국원 – 17대왕 소수림 – 18대왕 고국양 – 19대왕 광개토 이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고구려 19대왕이다.

한편 왕계보를 촌수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왕위승계는 부자상속만 있는게 아니고, 형제상속, 대습(손자)상속, 방계상속도 있었으니 저 왕계보를 촌수로 생각하면 안된다.

장수왕 사례를 보면 장수왕이 오래 살아서 태자 조다가 먼저 사망하고, 손자 문자명이 왕위를 승계했다. 본래는 20대왕 장수 – 21대왕 조다 태자 – 22대왕 문자명이 되는데, 문자명왕이 대습상속 하다 보니, 20대왕 장수 – 21대왕 문자명이 된 것이다.

이 처럼 부자상속 뿐 아니라 대습상속도 있어서 왕계보와 촌수가 달라는 현상이 있는데, 이로써 촌수를 확인하려며 왕계보에서 방계를 제외한 직계를 찾고, 직계조상 중 왕에 오르지 않은 왕자도 찾아야 한다.


【촌수】

1세 추모왕 – 2세 유리왕 – 3세 재사[왕자] – 4세 차대왕 – 5세 신상왕 – 6세 동천왕 – 7세 중천왕 – 8세 서천왕 – 9세 돌고[왕자] – 10세 미천왕 – 11세 고국원왕 – 12세 고국양왕 – 13세 광개토왕 이다.

고구려 왕계보에서 【3대왕 민중 – 4대왕 대무신 – 5대왕 모본 – 6대왕 태조 ~~ 8대왕 신대 – 9대왕 고국천 ~~ 14대왕 봉상 ~~ 17대왕 소수림 】은 광개토왕의 직계조상이 아니며, 광계토왕의 직계조상 중에 【재사와 돌고】는 왕에 오르지 않은 왕자이다. 그럼 우리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이 추모왕의 12세손 이며, 추모왕은 광개토왕의 12세조 이다.
환단사학은 우리 삼국사기가 광태토왕이 추모왕 13세손 이라 했다는데 이것은 틀렸다.


세손(世孫)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본론에서 빠져나와서, 세(世) 대(代) 세손(世孫) 대손(代孫) 세조(世祖) 대조(代祖)를 설명하도록 한다. 세(世)와 대(代)는 항렬을 구분할 때 쓰이고, 세손(世孫) 대손(代孫) 세조(世祖) 대조(代祖)는 조상과 후손 사이 촌수를 계산할 때 쓰인다. 즉 세(世)와 세손(世孫)은 다르다.


광계토왕의 촌수에서 보이듯 1세 시조 – 2세 아들 – 3세 손자 – 4세 증손자 – 5세 현손자 – 6세 래손자 – 7세 곤손자 – 8세 잉손자 – 9세 운손자 인데, 이곳의 세(世)는 ‘항렬’을 뜻 한다. 

그런데 이를 세조(世祖)나 세손(世孫)으로 바꾸워 표현하면, 5세조 – 4세조(고조부) – 3세조(증조부) – 2세조(조부) – 1세조(부친) – 본인 – 1세손(아들) – 2세손(손자) –  3세손(증손자) – 4세손(현손자) – 5세손(래손자) –  6세손(곤손자) –  7세손(잉손자) – 8세손(운손자)가 된다. 이곳의 세손(世孫)은 조상과 후손 사이의 ‘촌수’를 뜻 한다.

차이점은 운손자가 항렬을 표현하는 세(世)로 할 때는 9세 이지만, 촌수를 표현하는 세손(世孫)으로 하면 8세손이 된다.

이유는 항렬을 나타내는 世와 代는 본인의 세수(世數)도 포함 되지만, 촌수를 계산하는 세손(世孫)이나 대손(代孫), 세조(世祖) 대조(代祖)는 기준이 되는 사람의 세수(世數)를 제외하기 때문이다.

이해를 위해 예시문을 가져왔다.

 [표의 왼쪽 숫자가 항렬을 뜻 하는 世, 오른쪽 숫자는 촌수를 뜻 하는 世孫(=代孫)이다.]

이렇듯 世와 世孫은 다르다. 世에는 당대인 나의 세수(世數)도 숫자에 포함되지만, 世孫에서는 기준이되는 나 (또는 기준이되는 조상이나 후손)의 세수(世數)가 제외된다. 그래서 世의 숫자에서 -1 하면 世孫이 된다.

표에서 맨위 현조부는 잘못된 표현이다. 현(玄 : 검을 현)은 「멀다·깊다·가마득하다.」뜻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은 존재]의 표현이 담겨 있어서, 5세손을 현손자로 부르는 것은 맞지만, 5세조를 현조부로 표현하는 것은 조상을 욕 보이는 실수이다. 고조부를 초과하면 이분들은 5세조, 6세조, 7세조, 8세조로 해야한다.

한편 현손자를 고손자로 잘못 쓰는 경우도 있는데, 고(高 : 높을 고)는 「높다·크다·우러르다·존경하다.」뜻으로 [고귀한 존재]의 표현이다.
따라서 4대조를 고조부로 부르는 것은 맞지만, 4대손을 고손자로 부르는 것은 조상이 후손을 우러러 보고 존경하는 것이되어, 역시 조상을 욕 보이는 실수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제례를 보면 제사와 시제가 있는데, 고조부(4세조) 이하 부친까지는 그분의 기일에 집안에서 제사로 모시고, 5세조 이상은 돌아가신 기일과 상관없이 특정 일(한식날)에 묘역에서 시제로 모셔왔다.
이런 것으로 볼 때도 5세조 이상은 본래 명칭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세(世)에서 숫자 -1이 대(代)가 된다.”는 글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도 잘못된 표현이다.

본래 세(世)인데, 당 태종 이름 이세민의 세(世)를 피하여, 대(代)로 바꾼 것으로, 본래 세(世)와 대(代)는 항렬을 뜻하는 같은 표현이다.

반면 세(世)와 대(代)에서 숫자 -1하면 (기준이 되는 본인이나 조상 후손을 제외) 세손(世孫), 대손(代孫) 또는 세조(世祖), 대조(代祖)가 된다.

즉 1세 고조부 – 2세 증조부 – 3세 조부 – 4세 부친 – 5세 본인 인데, 고조부는 본인의 5세조가 아니며 4세조 이다. 만약 고조부를 5세조로 하면 ‘고조부가 고조부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틀린다.

그래서 이경우 기준이 되는 고조부는 세수(世數)에서 제외한다. 또한 본인은 고조부의 4세손 이지 5세손 아니다. 만약 본인을 고조부의 5세손으로 하면 ‘내가 나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역시 틀린다. 이때도 기준이 되는 나는 세수(世數)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집에 있는 족보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다만 1960년대 이후 최근 족보는 저 관계를 오기한 족보가 간혹 보이므로, 가급적이면 최소 1950년대 이전 또는 조선시대 족보를 참고해야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구려 장수왕이 남긴 비문은 광개토왕이 고구려 시조 17세손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는 12세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삼국사기 기록이 일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저런 현상 때문에 간혹 “삼국사기가 고구려 왕을 누락한 것 아니냐” 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고구려와 백제는 나당연합의 전쟁으로 멸망했고, 더욱이 왕족과 귀족들이 당나라 포로가 되어 끌려가거나, 왜로 망명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인들이 직접 남긴 ‘원시본기’가 많이 사라진 상태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구 삼국사가 쓰여졌고, 이런 부실한 사료를 바탕으로 고려 인종(1145년)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썼으니, 우리 삼국사기에서 왕이 몇명 누락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사료 부족으로 선왕와 후왕의 촌수를 잘 못 기록한 것이지 왕이 누락된 것은 아닐 것이다.


삼국사기의 왕계보 중 촌수 오기는 백제본기에도 추정되는 부분이 있다. 백제본기는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으로 되어있고, 개로왕 아들은 문주왕과 곤지왕자 이고, 문주왕 아들은 삼근왕 이며, 삼근왕 이후 곤지왕자 아들 동성왕이 왕에 오르며, 동성왕 아들은 무령왕 이고, 무령왕 아들은 성왕이 있다.

즉 성왕의 직계 계보는 개로왕(고조부) – 곤지왕자(증조부) – 동성왕(조부) – 무령왕(부친)으로, 개로왕은 무령왕의 증조부 이며 성왕의 고조부 인데, 일본서기는 개로왕 문주왕 곤지왕자 3형제, 동성왕은 곤지왕자의 아들, 무령왕은 개로왕의 친자이며 동시에 곤지왕자의 마복자(배를 문지른 아들)로 되어있다.

즉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은 무령왕의 부친 이거나 백부인데, 삼국사기는 증조부로 되어 있다. 이에 오늘 날 우리나라 사학과 교수 중에도 개로왕과 무령왕의 연대 차이가 얼마나지 않고, 우리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1145년에 쓰여졌으며, 일본서기는 720년 무렵에 쓰여졌으니. 우리 삼국사기가 백제왕계보 촌수를 오기했고, 일본서기 촌수가 맞지 않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비문에서 광개토왕이 고구려 시조 17세손 이지만, 우리 삼국사기는 12세손으로 했다고, 삼국사기가 고구려왕을 몇 명 누락한 증거로 볼수 만은 없다.

한편 나중에 기회되면 별도로 쓰겠지만, 우리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근구수왕이 백제14대왕 이나, 속일본기 칸무조는 근구수왕을 백제16대왕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속일본기는 백제왕이 온조왕 부터 시작하는게 아니고, 도모왕(부여의 동명왕 또는 고구려 추모왕 추정)부터 근구수왕이 백제16대왕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은 삼국사기가 ‘백제원시본기’에서 온조왕 위로 왕을 2명 누락했다고 추측해도 어느 정도 타당성 있을 수 있지만, 삼국사기의 고구려왕 계보 촌수 오기를 두고 왕이 누락됐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다.


이쯤에서 환단고기를 살펴보자.

이처럼 삼국사기가 고구려 왕계보 촌수를 잘못 기록하는 실수가 있자, 광개토왕비문을 근거로 삼국사기가 틀렸고, 환단고기가 맞다는 환단사학 추종자 글이 인터넷에 많이 보인다.

즉 환단고기가 정사라는 근거로 광개토왕비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지없이 전공사학이 사대주의와 친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환단고기를 부정한다고 욕을 한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 환단사관과 추종자가 얼마나 무식한지 알수 있다.

환단고기도 고구려 건국자는 추모왕이나, 그 국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환단고기에만 보이는 추모왕의 증조부(3대조) 고진이다. 이쯤에서 환단고기를 잠시 설명하도록 한다.

태백일사편에 47세 고열가 단제시절 해모수가 군사를 크게 일으키나, 단제가 우유부단 하여 제때 방비하지 못 하고 단군왕조는 멸망한다. 그리고 해모수에 의해 북부여가 건국된다.

환단고기의 해모수 가보를 살펴보면,

1세 해모수 – 2세 모수리 (장남) – 3세 고해사 – 4세 해부루이며, ‘전기 북부여왕조’라고 한다. 해모수는 장남 모수리와 차남 고진이 있는데, 장남 모수리가 북부여 왕조를 계승하고, 차남 고진이 위만을 토벌 후 고구려후(고구려왕)로 봉해진다.

고진의 가보를 살펴보면,

1세 해모수 – 2세 고진 (차남) – 3세 (이름 부전) – 4세 불리지 – 5세 고주몽이며, ‘고구려 제후국’이라고 한다. -고진의 아들은 이름이 전하지 않으니 [부전]으로 표기 하였다.-

우리 삼국사기는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 사이에 추모가 태어나는데, 환단고기는 해모수가 추모왕의 고조부이며, 불리지와 유화부인 사이에 추모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한편 고열가 단제의 후손 고두막이 전기 북부여 4대왕 해부루 때에 군사를 크게 일으키나, 해부루가 이를 막지 못 하고 항복한다. 이로써 고두막이 북부여왕에 오르며’후기 북부여왕조’가 시작한다.

이때 해부루가 왕실 만큼은 유지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고두막이 선정을 베풀어 해부루를 가섭원에 이주시키고 동부여 제후로 봉한다. 이 동부여가 환단고기에 보이는 가섭원부여 이다. 이후 고두막의 외아들 고무서가 후기 북부여왕위를 승계한다.

한편 유화부인이 불리지의 아들 추모를 임신하지만 부친 하백에게 쫓겨나고, 동부여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불쌍히 여겨 보살핀다. 이로써 추모가 동부여 왕국에서 출생하는데, 추모가 위협을 받으니 동부여에서 북부여로 탈출한다.

마침 북부여왕 고무서는 아들이 없고 외동딸 소서노만 있으니, 추모의 사람됨에 감명받아 소서노를 추모와 혼인시키고 추모에게 북부여 왕위를 물려준다.

즉 후기 북부여 왕조 계보는 1세 고두막 – 2세 고무서 – 3세 고주몽(추모왕)이며,‘후기 북부여왕조’라고 한다.

여기에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고두막 집안과 추모의 집안은 원수관계이다. 추모의 고조부 해모수가 단군조선 고열가 단제를 쫓아내고 왕에 올랐는데, 훗날 고열가 후손 고두막이 북부여왕 해루부를 가섭원으로 쫓아내고 다시 왕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해모수의 현손자 추모가 고두막의 손녀 소서노와 결혼하고 왕국을 승계받는다.

북부여왕에 오른 추모는 연호를 다물로 하고, 재위22년에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며 연호를 평락으로 바꾼다.

환단고기 광해본은 추모왕의 연호가 다물로 계속 되지만, 나중에 나온 환단고기 배달본에는 연호가 다물에서 평락으로 바뀌는 것이 보인다. 한편 원수관계인 북부여왕조 추모왕과 단군왕조 소서노의 혼인으로 두 나라는 고구려라는 새로운 나라로 화합하는데, 남북평화통일 염원이 느껴진다.

과연 조선 중종 때 살았던 일십당 이맥과 일제강점시절 살았던 운초 계연수는 훗날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질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인지. 환단고기의 작성연대를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앞에서 보았듯 추모왕의 직계 혈통은 1세 해모수 – 2세 고진(차남) – 3세(이름 부전) – 4세 불리지 – 5세 고주몽이다.

환단사학에 의하면 환단고기 태백일사는 조선 중종 때 관료 일십당 이맥이 쓰고, 1898년 계연수가 이를 옮겨썼으며, 1911년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4종의 서적을 묶어 환단고기로 이름 붙이고 30부를 출간 후, 1920년 이유립에게 1권을 전수하고, 이유립은 계연수의 유언에 따라 1980년 세상에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공사학에서는 환단고기를 이유립 창작으로 보고있다.

이에 환단사학과 추종자는 “전공사학이 사대주의와 친일성에 벗어나지 못 하여, 환단고기를 정사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환단고기를 누가 썼든지 문제는 둘째로 하고, 단군세기를 썼다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과 태백일사를 썼다는 조선시대 일십당 이맥은 모두 이유립의 직계조상 이며, 각각 고려사와 조선실록에 보일 정도로 고위 문관에 오른 유학자 이다.

그런데 이유립은 자신의 조상 이맥에 대해 항렬을 표시하는 세(世)와 계보에서 촌수를 셀 때 쓰는 세손(世孫)도 구별 못 하는 무학자로 만들어 놓았다. 아니면 자신의 조상 욕 보이는 짓을 계연수가 했는데 이유립이 한문을 많이 알고도 한자 용례에 무지하여 이를 몰랐다는 것 밖에 되지않는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해모수가 추모왕의 부친인데, 환단고기는 고조부(4대조)로 되어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앞에서 설명한 광개토왕비문 때문일 것이다.

이 비문은 광개토왕이 고구려 시조로 부터 17세손 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삼국사기는 사실 촌수를 오기하여 12세손으로 하였다.


이에 환단고기 저자는 비문에 보이는 17세손 이라는 숫자에 맞추려 했고, 추모왕 위로 4명의 왕을 만들기 위해, 해모수를 추모왕의 고조부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이 12세손 이라고 하였으니, 5명의 왕이 추가되어야 광개토왕은 17세손이 된다. 그런데 환단고기 저자는 어째서 4명만 추가했을까?

삼국사기가 1世 추모왕 2世 유리왕 – – – (생략) – – – 13세 광개토왕이니, 광개토왕은 시조의 12세손 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저자는 13세손으로 본 것이다. 즉 항렬을 뜻 하는 세(世)와 촌수를 계산하는 세손(世孫)을 구별 못한 것이다.


태백일사가 정말 조선 중기 유학자 일십당 이맥이 쓴 책인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만약 이맥이 썼다면 유학자 이므로 추모왕 위로 4명이 아닌 5명을 추가 시켜야 정상이다. 이 처럼 환단고기가 항렬을 뜻 하는 세(世)와 촌수를 계산하는 세손(世孫)도 구별 못 하는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세(世)와 세손(世孫)의 차이를 혼동하는 1970년대 이후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설령 환단고기 저자가 추모왕 위로 5명의 왕을 추가시켜 광개토왕을 해모수의 17세손이 되게 해놓았어도, 이는 광개토왕비문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틀리게 된다. 이유는 비문에서 시조가 누구인지 확인하면 알 수 있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생각하옵건데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도다.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왔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시다.


이처럼 비문은 고구려 시조는 추모왕 이며 천제(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였지, 시조를 해모수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나왔지, 환단고기 처럼 동부여에서 나와 북부여로 들어간게 아니다.


다시 설명하면, 광개토왕비는 광개토왕을 고구려 시조 17세손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는 12세손으로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광개토왕을 시조 17세손으로 되어있다며, 환단사학과 추종자는 환단고기가 정사라는 증거로 광개토왕비문을 제시한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고구려 계보를 살펴보면, 광개토왕은 해모수의 16세손이지 17세손이 아니다.

한편 비문을 살펴보면 시조는 추모왕 이지, 천제(해모수)가 아니다. 또한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왔지 동부여에서 나와서 북부여로 들어간게 아니다.

즉 비문에서 고구려 시조는 추모왕이고 광개토왕은 추모왕의 17세손 이지, 태백일사 처럼 추모왕의 고조부로 되어있는 해모수의 17세손이 아니다.

한편 환단사학이 우기는 대로 비문의 시조가 해모수 이더라도, 환단고기에 보이는 고구려 왕계보는 광개토왕이 해모수의 16세손이 되어, 역시 17세손이다는 비문에 틀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17이라는 숫자만 보이는지, 광개토왕비문을 두고 환단고기가 정사라는 증거라며 우기니 이해 않되는 짓이다.

이 처럼 광개토왕비는 환단고기가 오히려 거짓이며, 세(世)와 세손(世孫)의 차이도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세(世)와 세손(世孫)을 구별 못하던 시기에 쓴 책이라는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