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은 성공하고 제갈량은 실패한 이유

한신과 제갈량의 차이는 뭘까?

한중의 지형과 교통, 특히 한수 상류 지역에 형성된 공간은 역사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상고시대 이래로 오늘날의 한수와 서한수는 교통에 이용되는 물길이었습니다.
서한수는 지금의 간쑤성 텐수이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룽난 지역의 리현을 거친 후, 다시 서남쪽으로 히허 현, 청현을 지나, 산시성 뤠양으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다시 직진하여 서쪽으로 흘러가 한수이와 연결되고, 다시 멘현, 한중지역, 안캉 지역을 지나, 후베이 성으로 진입한 후, 다시 시엔, 상판, 진먼, 샤오간 등지를 거쳐 우한에서 장강과 합류합니다.

– 당시의 한수 상류 악양 일대는, 거대한 산간 하천과 호수 도시여서 천지대택(天地大澤)이라 일컬어졌습니다.
천지대택의 물길은 저수량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기 때문에, 한수 상류의 여러 물줄기로 선박 운행이 가능하여 수로 교통이 편리했습니다.

한중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농서까지 닿을 수 있었고, 반대로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초 땅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넓고 넓은 한수는 농남, 한중, 형초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전 280년 진나라 장군 사마착이 진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격할 때도 농서군(지금의 텐수이)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한수를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가 한중에서 초나라 검중군(지금의 후베이 스옌, 주산과 주시) 일대로 밀고 내려갔습니다.

– 한수 전약에 선박 운행이 가능했던 이런 상황은 고후 2년, 즉 기원전 186년에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해 봄 섬서 악양과 영강 지역에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역사에서 무도지진이라 부르는 이 재난으로 산이 무너졌고,
이로 인해 한수는 서한수와 한수로 양단되어 옛 물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또 다시 지형의 변화로 악양 일대에 가릉강과 한수를 가르는 분수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서한수와 부근의 물길은 남쪽 사천성으로 유입되면서 가릉강의 수원이 되었습니다.
서한수를 잃어버린 한수는 강의 길이가 짧아지고 수량도 감수하여 선박 통행도 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 답사에서 돌아오고 저우홍웨이 선생의 장편 논문 “한나라 초기 무도대지진과 한수 상류의 수로 변화”를 읽었습니다.

마음속 의문이 해결되어 시원하고 즐거웠습니다.

‘고도’를 거쳐 관중을 공격한 한신의 전략과 행로에 대해 마침내 고금을 관통하는 이해의 근거를 얻었습니다.

– 한신이 대군을 거느리고 관중을 공격한 것은 기원전 186년의 무도 대지진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는 한수가 농산 서쪽에서 호북 서쪽까지 이어져 있었고, 한수 상류 지역은 선박 운행이 편리했습니다.

뱃길로 한중에서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농서에 닿았고, 또 천지대택애서 북상하면 옛길을 따라 진창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통 상황에서 한신이 몰래 진창도로 나간 전략은 식량과 병력을 수송하기에 큰 장애가 없었습니다.

또한 한신의 대군은 진창으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서한수를 따라 옹군의 통제 아래 있는 하변과 서현을 공격해야 했습니다.

이 공격은 위장술을 써서 농서를 공격하는 허장성세의 일환이었던 동시에 한수의 물길을 봉쇄하여 농서의 옹군이 물길을 따라 내려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나라의 대군이 진창으로 나간 후 옹군이 한중을 습격하여 배후에서 유방의 군대를 노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신은 여러가지 책략을 꼼꼼하게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한수의 옛 물길을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천혜의 조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00년 후 제갈량은 다섯 차례나 북벌에 나섯지만 매번 실패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당시 한수의 물길이 끊어져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어찌 하늘이 돕지 않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아! 운명이로다!

–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리카이위안)』

요약)

– ‘본래의’ 한수는 농서에서 한중을 거쳐서 형초로 흘러가는 물길이었음.

그래서 악양 일대에는 천지대택이라는 대규모 호수 – 늪지대가 존재.

진나라의 초 공격, 한신의 북벌에서도 한수의 물길이 군사적으로도 중요하게 사용함.

한신

– 하지만 한나라 초기에 대지진으로 한수가 양단되며 수로 교통로가 완전히 붕괴, 이후 서한수와 한수가 완전히 차단되며 서한수-가릉강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수로가 됨.
그리고 한수 자체의 수량도 줄어들어서 수로 교통로로서 이전보다 여건이 크게 약화됨.

– 본래 한신 시절에는 한수를 수로로 사용해서 진창, 농서까지 동시 공격할 수 있었지만, 제갈량 시절에는 한신 시절에 있던 수로가 없어졌기 때문에 육로로 공격하게 되버렸다.

리카이위안 씨의 주장은 그러므로, 제갈량은 행군속도에서 보급역량까지, 한신 시절보다 훨씬 불리해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전한(前漢)은 한수(漢水)의 물길을 타고 흥성했지만,
촉한(蜀漢)은 한수(漢水)의 단절에 막혀 무너졌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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