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과 고구려의 1대왕 주몽 에 대해

동명과 주몽의 관계

(1)동명
  『논형』길험편과『후한서』부여조에 보면 북이 색리국왕이 출타중에 하녀 하나가 임신을 하자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그 시녀는 하늘에서 달걀만한 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녀를 옥에 가두었는데 사내아이를 낳으니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렸으나 짐승들이 보호하였다.그래서 하늘이준 아이라고 생각해 어미에게 주었다, 그는 마소를 맡아기르게 하였는데 그가 활을 매우 잘쏘자 위협을 느낀 왕이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 남쪽으로 달아나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올라와 다리를 놓아 건너게 되었다.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이 북부여의 마지막왕에게 위협을 하자 해부루가 재상인 아난불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쪽의 가섭원으로 옮겨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동부여라고 하였다.

(2)고리국
  고리국이란 동명이 출발한 곳으로 북이(北夷)라고 불렀다. 그는 그곳을 출발하여 부여에 이르렀으며 졸본부여를 세웠다. 고리는 고이(高夷),구려(句麗) 등과 통하는 말로 그들은 고구려와 같은 맥족이였다.

고주몽이 떠난 곳은 동부여였으므로 출발지가 자체가 틀리다.


   그러므로『흠정만주원류고』부여조에는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부여는 색리에서 나왔는데,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색리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 역시 남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3)졸본부여
  『삼국유사』고구려조에 ‘동명제는 졸본부여의 왕을 말한다’고 하였고 동부여조에는 ‘천제가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곳을 피하라’라고 하였다.

(주석:동명이 장차 왕이 될 조짐을 이름이다) 라고 하였다.북부여조에는 동명제가 북부여에 이어 일어나 도읍을 졸본천에 정하여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라고 하였다.

(4)주몽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북부여의 왕자인 해모수(?)와 압록강가에서 만나 야합하여 임신을 하고 그 아비인 하백으로 쫓겨나 방황하다가 동부여 2대왕인 금와왕에게 발견되어 왕실로 들어가 아이를 낳으니 알이 태어났다.
그 알을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렸으나 짐승들이 도리어 보호하는 것을 기이여겨 그 어미에게 주자 주몽이 태어났다.


  그는 마구간에서 마을 기르는 일을 맡았으며 활을 매우 잘쏘았다.
그  당시 동부여 금와왕의 적자인 대소의 위협을 받자 그 어미는 그를 달아나게 하였다.
그는 오이,마려,협부 등을거느리고 엄리대수(송화강)에 이르러 거북과 자라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너 졸본에  이르렀다

.

(5)동명과 주몽
  동명은 고리국에서 부여에 이르러 졸본부여를 세웠다.

주몽은 동부여에서 출발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웠다.
즉 고리국 이전에 부여가 이미 존재했고, 고구려이전에 이미 졸본부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왕조에는 주몽(朱蒙)으로 되어있지만 <광개토대왕비문>과 <모두루묘지>에는 추모(鄒牟)로 되어있으며『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중모(中牟) 등으로 불리워졌다.

    즉 『해동역사』고구려조에 ‘동명이 빛나는 왕업을 열었고 주몽이 그여파를 계승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나라에서 죽은 천남산의 묘지명에는 ‘옛날에 동명이 기를 느끼고 호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라고 하여 고구려인들 스스로가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이였음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두이어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워 호(胡)를 제압하였으며 서주(徐州)와 통하고 연(燕)을 막았도다’라고 하여 고구려가 동명의 후예임을 자처하였다.

주몽


   이러한 동명은 고구려인들의 시조로 받들어 졌을 뿐만아니라 백제의 시조로도 받들어졌다. 『위서(魏書)』백제국조에 동성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근원이 되었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북사』백제전에는 ‘백제국은 모두 마한에 속했던 땅인데 색리국(索離國)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였고 일본의 정사인『續日本紀』환무천황 연력 9년 7월조에는 ‘대저 백제의 태조 도모(都慕)대왕은 일신(日神)이 강녕하여 문득 부여(扶餘)를 개국하였는데, 천제의 비기를 받아 제한을 거느리고 왕을 칭하였다’라고 하여 그들의 백제의 시조가 도모 즉 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임을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환무천황은 의자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천지천황의 아들인  시기황자의 후손인 광인천황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인 고야신립희는 무년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예인 화사사을계의 딸이다. 특히 그의 비인 교법녀는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의 후예였던 백제왕 경복의 손자인 준철의 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백제의 시조가 동명이였음을 정확히 전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三國史記』에 의하면 온조왕(溫祚王)이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운 이후 다루왕,구수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아신왕, 전지왕 등이 왕위에 오른후 이곳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유적을 백제의 도성이 있었던 하남시 고골의 동쪽에 자리잡은 검단산에서 제사유적을 백제문화연구회에서 1992년에 찾아냈는데 그곳은 정상으로부터 남쪽으로 4번째 봉우리에는 있는데 잔돌을 이용해 폭 281m, 길이 704m의 직사각형으로 축조 되어있다.

이곳에서는 검단산의 정상이 북쪽으로 바라다 보이며 이 제단의 끝부분에는 제물을 진설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넓은 바위가 남아있다.


(6)고리국의 위치
  동명이 출발한 고리국의 위치는 『요사(遼史)』지리지에 ‘봉주(鳳州)는 고리국(槀離國)의 옛땅이다’라고 하였다. 이곳은 현재 요녕성 창도현(昌圖縣)에서 서북쪽으로 200리 지점에 있는 내몽고 자치주의 동부에 있는 고이사랑(古爾嘎朗)이다. 북한의 이지린도 고리국의 위치를 소능하이북 대능하와 서요하 상류지역으로 보고있다.


     그런데 정형진의 조사에 의하면 성산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내몽고(內蒙古 ) 파림좌기(巴林左旗)의 아이산(阿爾山)의 남쪽 끝에는 닭을 닮은 계자(鷄子)바위가 남아있어 이 지역이 동명의 태어난 고리국이 있었던 지역이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7)고구려와 몽골
    박원길은『몽골비사』에서 몽골의 시조인 보돈차르에 대해 닐롱몽골이 나온 몽올실위는 보돈차르의 후손이며 그의 어머니이며 몽골의 여조상인 알랑코아의 아버지는 코리(Khori)부족이다.

그녀는 빛과 결혼하여 보돈차르를 낳았다. 즉 몽골족은 코리부족의 외손이 되는데 코리부족은 바이칼호의 중서부에 있는 올혼섬을 탄생지로 하고 있다.

필자가 이 지역을 조사하여 보니 올혼섬은 바이캉 호수중에서 가장 큰섬으로 이섬의 하지르마을에 부르칸바위가 남아있는데 이곳은 시베리아의 모든 신들이 모이는 곳으로 시베리아 샤머니즘 최대의 성소이다.


   이 신화는 동명과 같이 일광감생의 요소가 등장하고 있어 몽골의 시조인 코리족와 동명의 고이(藁爾)족은 같은 종족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몽골의 동쪽 끝에 있는 보이르 호수가에는 동명의 석상이 남아있는데 몽골의 많은 석상들이 목이 잘려 있는데 유독 이 석상만은 온전한 형상을 하고 있어 이들이 동명을 얼마나 받들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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