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원인

조선의 치욕 정묘호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묘호란

청태종 초상 조복본 일부

1627년 정묘호란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이미 학계에서 여러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여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러 한의 원년 정월 초8일에 아민 버일러, 지르갈랑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두두 타이지, 요토 타이지, 쇼토 타이지에게 대군(amba cooha)을 맡겨 조선국(solho gurun)에 명(nikan)의 모문룡을 찾도록 군대를 보냈다.

『만문노당』 천총 원년 1월 8일

너희 나라는 또 대명(daiming)을 도와 나의 백성을 유인하여 불러 대명에게 (백성으로) 삼게 하고, 너희 땅에 살게 하고, 곡식을 주고 살려서 나를 죽이려 힘쓴 까닭에 내가 분노하여 정묘년에 너희를 정벌한 이유가 그것이다.

『만문노당』 숭덕 원년 11월 29일

조선과 만주의 모든 기록을 막론하고 정묘호란의 일차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바로 모문룡입니다. 명나라의 장수였던 모문룡은 1621년 후금이 요동을 석권하자 요동반도를 순회한 뒤 압록강 하구의 진강을 수복했고, 뒤이은 후금의 공격을 피해 조선으로 넘어와 가도를 점거했습니다. 모문룡이 이곳을 동강진(東江鎭)으로 칭하고 요동에서 조선으로 피난한 한인들을 규합하면서 동강진은 일종의 자치구와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모문룡 군단은 조선의 뒤에 숨어서 후금의 배후를 노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모병(毛兵)이라고 불린 이들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후금 내 한인들의 이탈과 반발을 조장했고, 여기에 더해 서고신과 같은 장수들은 창성 일대에서 독자적인 부대를 이끌고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문룡의 활동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낮게 평가되기도 하지만, 후금의 입장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제해권이었는데, 모문룡 군단은 그들이 장악한 제해권을 십분 활용하여 1625년에는 요동반도를 돌아 요하 하구의 요주(耀州)ㆍ해주(海州)에 출몰하고 1626년에는 영원성 전투로 후금의 기세가 꺾인 틈을 타 안산(鞍山)을 치기도 합니다. 그가 야심차게 기획한 안산 공격은 비록 천여 명이 전사하는 패배로 끝났지만, 칼카 원정 중이던 누르가치는 이 소식을 듣고 놀란 나머지 심양으로 급히 돌아왔고, 직후 모문룡에게 간곡한 회유 서신을 보낼 정도로 그 위상이 커졌습니다. 누르가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모문룡 척결을 선결과제로 꼽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상께서 가라사대 “적이 까닭 없이 군사를 움직였으니, 어째서인가?”라 하시니, 강홍립이 가로되 “지난해 노추(奴酋)의 죽음에 본조가 치위(致慰)하지 않아 적이 자못 유감을 품었습니다. 마침 모문룡이 이완을 미워하여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하고자 거짓으로 중조(中朝)의 격문을 지어 ‘조선과 더불어 합세하여 초멸’ 등의 말로 격동시킨 까닭에 적이 비록 군사를 움직였으나, 신들은 봉황성에 이르러서야 우리나라로 향하는 것을 알았습니다”라 하였다.

신달도, 『강도일록』 정묘년 2월 10일

모 도독(毛都督)이 비밀 게첩을 보냈는데, 그 말이 가로되 “한두 변신(邊臣)이 몰래 다른 뜻을 품고 장차 노(奴)를 인도하려는데 국왕은 모르시오?”라 하였다. 비국이 의논하여 아뢰길 가로되 “지금 모장의 게첩을 보니 그의 마음가짐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이는 변신에 대한 감정이 쌓여 겁제(劫制)하려는 계책에 불과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4년 12월 26일

여기서 정묘호란 도중에 강화를 중재하러 인조를 알현한 강홍립은 흥미로운 증언을 남깁니다. 모문룡이 조선 의주부윤 이완을 제거하기 위해 후금을 자극한 모략이 곧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기록을 제외하면 확인되지 않는 주장이지만, 실제로 당시 모문룡과 이완의 대립이 극에 달한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모문룡 군단은 끊임없이 조선에 군량 지원을 요구한데다 소규모 부대로 조선을 드나들며 민간에 횡포를 부렸고, 창고의 양곡을 탈취하는 등 이완과 끊임없이 충돌했습니다. 특히 1626년에는 의주에서 모문룡 군단을 단속하던 역승혜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모문룡이 감추던 안산에서의 패전이 발각되었고, 누르가치의 회유 서신까지 입수되면서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습니다.

급기야 정묘호란을 2달 앞둔 시점에 이완이 민가를 약탈하는 한인을 저지하러 보낸 아병이 피살당하고, 다시 이완이 그 범인들을 체포한 사건을 기점으로 둘 사이의 악감정은 수면 위로 터져나왔습니다. 악에 받힌 모문룡은 급기야 조선 측에 이완이 후금과 내통한다는 모함을 전달하고, 전달하고, 또 전달했습니다. 그가 이완에게 가지고 있던 앙심은 이완이 죽은 뒤에도 온갖 매도를 퍼부을 정도였으니, 거꾸로 모문룡이 이완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후금을 자극했다는 주장도 이상할 것 없는 셈입니다. 다만 강홍립의 이 말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지와 별개로 이 사건이 정묘호란의 발발에 얼마나 결정적인 원인이었는지는 회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 아버지(han ama)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한인(nikan)은 우리와 전쟁하고 있는데도 관원을 보내서 복상(sinagan)의 예로 제사지내고자, 새 한이 즉위한 예로 만나고자 왔었다. 너희 조선과 우리 아버지 한은 좋게만 지냈을 뿐, 하나의 작은 악(majige ehe)도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파견해 소식을 물으러 보냈으면 또 어떠했겠는가? 이것이 일곱이다.

『만문노당』 천총 원년 4월 28일

너희 나라에 네 가지 죄가 있다. 천가한(天可汗)께서 빈천(賓天)하셨는데 즉시 사신을 보내 조문하지 않았고, 선천(宣川) 싸움에 하나도 주륙하지 않았는데 즉시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고, 모문룡은 우리의 큰 원수인데 내지에 수용하여 군량을 주고 보살피고, 요민(遼民)은 우리 적자(赤子)인데 도망자를 부르고 배반자를 들이며 하나도 송환하지 않았으니, 나는 몹시 한스럽게 여긴다. 운운.

『속잡록』 정묘년 1월 14일

강홍립의 증언 가운데 누르가치의 사망에 조선이 조문하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까지 간과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조선과 만주 측 기록이 모두 전쟁의 명분과 관련해서 이 문제를 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교적 관혼상제에 큰 의미를 부여하던 조선 사회의 관념에서 이 지적은 의미 있게 생각되었을 터인데, 강홍립이 다른 이유는 생략하고 모문룡과 함께 이 문제를 남긴 것이나 『속잡록』에서 청군이 내세웠던 전쟁 명분 가운데 이 문제를 으뜸으로 기술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이 투영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에 맞서 조선이 ① 우리나라는 아직 그대들과 원한도 은의도 없다 ② 사신이 안 통해서 경조사를 알지 못했다 ③ 우리나라 경조사에 그대들이 사신을 보낸 적도 없다는 반박논리를 내세운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물론 조선이 정말로 8월에 사망한 누르가치의 사망을 몰랐던 것은 아니고, 『실록』에 따르면 9월 21일 창성부사 김시약의 보고를 통해 처음으로 노추(奴酋)의 사망 소식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이는 얼마간 핑계가 섞인 반론이지만,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볼 점은 조선이 소문으로만 누르가치의 사망을 알았을 뿐 정식으로 부고를 받은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곧 신생국가 후금은 ‘당연히’ 자신들이 국제사회의 한 나라로서 그에 상당하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선은 ‘당연히’ 후금이 먼저 국제사회에 나라답게 모습을 비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때까지는 일개 여진 부락의 연장선상에 두는 인식의 격차가 집약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의 누르가치 조문 문제는 결코 간단히 넘길 만한 문제가 아닌 셈입니다.

이어서 물으시길 가라사대 “이 적이 모장(毛將)을 잡기 위해 온 것인가?”라 하시니, 장만이 가로되 “듣기로 홍태시(洪泰時)란 자가 매번 우리나라에 힘을 쏟고자 했다는데, 이 적이 립(立)하였다면 분명히 그 계획을 이루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인조 5년 1월 17일

추장의 둘째 아들 망고태(忘古太)와 셋째 아들 홍태시(紅太是)는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조선ㆍ여허ㆍ재새가 모두 남조(南朝)를 구원했는데, 재새는 지금 이미 파멸되었습니다. 조선이 비록 강화하자고 말했지만 아직 정확한 통보를 받지 못했으며 그 실상은 다시 군대를 원조하려고 하니, 조선을 뒤에 두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획은 불가합니다’라 하였습니다.

조경남, 『속잡록』 기미년 11월 20일

정묘호란 초기 인조가 전쟁의 원인에 대해 의문을 보이자, 장만은 모문룡 대신 홍타이지의 주관적인 의중에서 원인을 찾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곧 조선이 광해군 시절 수집한 정보에 근거한 판단이었는데, 1619년 심하 전투 이후 후금의 포로가 된 강홍립과 탈출하여 돌아온 황덕영ㆍ황덕창 등이 누르가치의 아들 가운데 홍타이지가 조선 공격을 주장하고 있으며, 다이샨은 반대로 화친을 주장한다는 첩보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시기 후금을 견문하고 돌아온 이민환과 정충신이 모두 홍타이지가 출중하지만 사나운 인물이라는 평가를 남기면서 이러한 인상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당시 비변사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토대로 홍타이지가 후금의 조선 정책을 좌우하지 못하게 견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홍타이지라는 인적 요소 자체를 정묘호란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2020년에 이르러 계승범의 「정묘호란의 동인 재고」에서 다시 한 번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즉위 이전부터 조선 침공을 주장하고 있던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을 통해 ①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② 영원성 전투로 꺾인 기세를 반전시키며 ③ 즉위 초기의 불안한 정국을 장악한다는 의중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정묘호란을 일으킨 홍타이지의 의중을 단순한 관성적 의견이나 개인적 성품으로 보는 것을 뛰어넘어 한 차원 심화시킨 것으로서,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지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홍타이지가 선택한 것이 왜 하필 조선이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다른 원인도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천계 갑자년(인조대왕 2년) 역적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몸을 빼내 오랑캐에 들어가 강홍립을 만나서 우리 조정이 그 집안을 이멸(夷滅)하였다고 속여 그의 효경지심(梟獍之心)을 돋우었다. 정묘년 정월 철기를 규합하여 의주로 돌입하니, 흉봉(兇鋒)이 이르는 곳마다 닭과 개도 사라졌다.

김장생, “거의록”, 『사계전서』

기익헌이 이괄과 한명련을 참하였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몸을 빼내 도망하여 구성(龜城)에 해가 지나도록 숨어 있었다. 부사 조시준이 비로소 소문을 듣고 체포하고자 하니, 한윤이 낌새를 알고 도주하여 노호(虜胡)로 들어가 우리나라가 어지럽다고 말하였다. 사로잡힌 장수 강홍립ㆍ박난영 등이 이를 믿자 노병(虜兵)이 마침내 동침(東侵)할 모략을 가졌다.

김시양, 『하담파적록』

반면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선 사람들은 정묘호란의 원인을 조선의 배반자에서 찾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 주장은 충(忠)과 역(逆)이라는 이분법적 도덕논리를 통해 원인을 파악한 것이자, 비난하기 좋은 대상에게 문제를 집중시켜 명료화한 것으로 지금과 같이 당시에도 강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원인은 바로 정묘호란 당시 후금에 있던 한윤과 강홍립이었는데, 1624년 이괄의 난에서 살아남아 도주한 한윤이 강홍립을 속였고, 이로써 두 사람이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어 정묘호란을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두 사람이 실제 홍타이지의 의중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애매하게 넘기고 있으며, 달리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점에서 ‘정치적 수사’ 내지 ‘의혹 제기’에 그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한윤이 조선 공격을 선동한 사실은 만주 측 기록을 통해 입증됩니다. 1625년 후금에 망명한 한윤ㆍ한의는 조선의 군사 첩보를 보고할 때 “새 왕이 즉위하고부터 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르지 않고 옛 왕을 생각합니다. … 한의 군사가 조선의 관원들을 이끌고서 왔다고 들으면, 누가 즐거워하며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글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후금은 정묘호란에서 조선 출신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강홍립 역시 후금의 입장에서 민심을 회유하는 방문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조선 측에서는 충분히 이들을 의심할 만한 사유가 있었으며, 비록 이들이 전쟁을 지지하지는 않았더라도 조선 침공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홍타이지에게 중요하게 고려되었을 여지는 충분합니다.

이때 국중(國中)에 큰 기근이 들어 두미(斗米) 가격이 은 8냥이었고 사람들이 서로 먹는 자가 있었다. 국중에 은량이 많았으나 무역할 곳이 없었다. 이로써 은이 천하고 뭇 물건이 등귀하였다. 좋은 말 하나가 은 300냥, 소 하나가 은 100냥, 망단(蟒緞) 하나가 은 50냥, 포필(布疋) 하나가 은 9냥이고, 도적이 빈번히 일어나 소와 말을 빼앗고 훔치며 혹 겁살(劫殺)하였다.

『청실록』 「태종문황제실록」 천총 원년 6월 23일

천명조(天命朝)의 제1 요점은 병력의 충실로 시종 일관하였으며, 적게 보더라도 15만의 병력을 가지게 된 형편이었는데, 정작 이들 병사의 보급은 어디서 구해야 하겠는가… 더욱 곤란한 것은 명과의 평화상태가 파괴된 결과, 천산물(天産物) 즉 인삼ㆍ초피 등 종류의 수출지가 상실되었으므로 국민의 수요품이 모두 두절된 것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중대한 문제가 되어 눈앞의 해결을 요하는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稻葉君山, 『淸朝全史 : 上卷』, 213~214쪽 (필자 번역)

1914년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청조전사』에서 후금 내부의 경제적 사정에 주목하면서 이를 정묘호란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이후 정묘ㆍ병자호란 연구의 중요한 접근법이 되었다는 점에서 선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1978년 김종원은 「정묘호란시의 후금의 출병동기」에서 이를 더 발전시켜 후금의 경제적 기반이 농경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인 농경인력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따라서 한인의 이반을 부추기는 모문룡 및 그를 비호하는 조선이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고 보아 후금 내부의 경제적 사정과 모문룡의 위치를 큰 틀에서 결합시키는 관점을 제기했습니다. 이로부터 한명기는 정묘호란의 원인을 조선이 아니라 후금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설에 가까운 이 관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당시 후금의 요구 가운데 경제적 측면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당초 후금이 요구한 것은 목면 4만 필, 면주 4천 필, 포 4천 필, 소 4천 두였는데 정작 기근을 해소하기 위해 갈급한 미곡은 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적으로도 같은 시기 홍타이지가 명나라에 요구한 금 십만 냥, 은 백만 냥, 비단 백만 필, 모청포 천만 필과 비교하면 대단치 않은 수준입니다. 농경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농경인력인 조선인 포로를 무상으로 쇄환하는 모습에서 모순이 존재합니다. 원정군의 보급을 조선 내에서 조달하여 식량 소모를 일시적으로 줄이는 효과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를 으뜸가는 원인으로 꼽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정황기는 남타이로, 양황기는 어푸 다르한으로, 정홍기는 어푸 호쇼투로, 양홍기는 시위 보르진으로, 양람기는 구산타이로, 정람기는 토보호이로, 양백기는 처르거이로, 정백기는 칵두리로 8명의 고산액진을 삼아 일체 사무를 총리하고 뭇 의정처(議政處)에 뭇 버일러와 함께 앉아 함께 의논하며, 수렵을 나가고 군사를 움직일 때 각자 본기의 병력을 거느리고 행동한다.

『청실록』 「태종문황제실록」 천명 11년 9월 8일

태종은 두 황기의 지배 대신에, 지금까지 자기 소속이던 정백기를 제공해서 여기에다 정황기이던 도도를 들였다. 도도는 아직 13세의 어린 나이여서, 실질적으로는 이 기를 태종의 지배하에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양황기인 도르곤은 그 지위를 잃고, 형 아지거가 지배하는 양백기로 옮겼을 것이다. … 두 황기ㆍ두 백기의 4기가 태종의 세력 하에 두어진 것은 확실하다.

서정흠, 「팔기제와 만주족의 중국지배」, 『만주연구』 제3집

추가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홍타이지가 즉위와 함께 팔기를 대대적으로 재편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만문노당』에 따르면 양황기 소속이었던 칵두리는 『청실록』에서 홍타이지 즉위 직후 정백기 구사어전으로 배치되었고, 『팔기만주씨족통보』에서도 정백기 소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홍타이지 즉위와 함께 정백기에서 정황기로, 정황기에서 양백기로, 양백기에서 양황기로, 양황기에서 정백기로 소속 구사가 바뀐 사례는 대조 가능한 모든 인물에게서 확인되는 양상입니다. 이것이 해당 구사의 이름을 교환한 것인지, 아니면 수뇌부만 이식한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홍타이지가 즉위하면서 누르가치가 가지고 있던 정황기ㆍ양황기를 장악하기 위해 인위적인 조작을 단행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관건은 이 같은 조치에 따르기 마련인 마찰과 반발을 어떤 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불어 팔기는 군사조직의 기능도 겸하는 만큼, 각 구성원이 인위적으로 재배정된 위치와 역할을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 있는 계기도 필요합니다. 정묘호란과 같은 실전 경험은 바로 이러한 필요에 정확히 부응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정묘호란 당시의 홍타이지는 조선에 들어오지 않고 요동에 있었지만, 그 직후인 5월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영원성으로 출정한 사실은 직접ㆍ간접적으로 통수권을 장악하고 시험하려 한 홍타이지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후로도 홍타이지는 팔기 조직을 정비하고 장악하는 데 힘을 쏟았고, 천총 9년에는 구사를 일률적으로 정비해 ‘황제’로 올라설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상과 같은 정묘호란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강경파 홍타이지의 즉위 (여건)

ⓑ 조선 출신 협력자의 확보 (여건)

ⓒ 모문룡 등 한인 세력 제거 (목적)

ⓓ 홍타이지의 정국 장악 (목적)

ⓔ 영원성 전투의 충격 극복 (목적)

ⓕ 후금의 국제적 위치 설정 (목적)

ⓖ 후금의 경제적 고립 타개 (목적)

ⓗ 재편한 팔기 조직 정착 (목적)

재미있느 역사이야기는 성공공식으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