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과연 모두 진실일까?

전염병, 유언비어, 그리고 차별 Pandemic, Rumor & Discrimination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우리는 이 말의 어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1920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도쿄를 비롯한 일본 관동 지역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와중에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여러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곧 조선인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그 과정의 도화선이 되었던 유언비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한 마디는 근대 시기에 있었던 한국인들의 애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언비어가 관동대지진 때에만 있었던 ‘특수한 사건’이었을까. 

기록을 찾아보면, ‘누구누구가 우물에 독을 풀었다.’라는 유언비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의 유언비어는 전염병의 창궐과 깊은 관련을 가졌습니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연로(沿路)에 괴질이 크게 유행하여 산해관 이남의 연해안 지역 수천 리 사이에 사망한 백성들이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그 발병 원인은 애당초 남만에서 백련교(白蓮敎)를 익히는 자들이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우물에 독약을 살포하고 오이밭에 독약을 뿌리는데, 사람들이 그 오이를 먹거나 샘물을 마시면 즉시 사망하여 백 명 중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이달 초순에 난주부(灤州府)에서 비로소 두어 사람을 체포하여 조사하고 샘물을 퍼내어 실증을 얻었으므로 지금 바야흐로 잔당을 체포하는 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21년(1821) 8월 17일

이 기록은 순조 대에 서장관 홍언모(洪彦謨)가 청나라의 사정에 대해 알리는 부분입니다.

1820년대에 동북아시아에는 인도로부터 유래된 콜레라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처음 접하는 질병이었기에 그 피해가 매우 컸습니다.
한반도에서도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중국 역시 셀 수 없이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홍언모는 콜레라의 발병 원인을 “백련교 교도들이 돌아다니면서 우물에 독약을 살포하고 오이밭에 독약을 뿌렸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콜레라는 인도에서부터 유래된 것이기에 이러한 말은 그 근거나 신빙성이 전혀 없는, 유언비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몇몇 사람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등 유언비어를 근거로 백련교 교도들을 잡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련교 교도들은 18세기 말에 청 조정을 상대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1796-1804) 청으로부터 요주 대상이 된 지 오래였습니다. 

그 이전부터 백련교는 사교(邪敎) 취급을 받았지만, 이후로 완전한 탄압 대상으로 낙인찍힌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후 관계를 생각해 보았을 때, 백련교도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는 백련교 교도들이 사회적 약자 집단이었기에 이들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써 유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관(官) 역시 백련교도들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유언비어에 편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염병

유럽에 흑사병이 퍼져 유럽 사회가 마비 상황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흑사병의 배후에는 유대인들이 있으며,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다니며 흑사병을 퍼뜨린다는 소문이 횡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유언비어가 유럽에 퍼지자 유럽 곳곳에서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질시와 박해가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유대인 역시 흑사병에 의해 희생되었음에도 말입니다.

 
백련교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러한 처우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동유럽, 이탈리아, 터키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는 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도 유포되어, 많은 수의 나병 환자들 역시 누명을 쓴 채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콜레라와 흑사병의 사례를 보았을 때, 우리는 사회적 소수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그다음에는 어디선가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집단에 관한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해당 사회나 공동체에 유언비어와 관련된 특정 집단을 차별해도 된다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진 채 혐오와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정부 역시 이러한 차별에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 즉, 전염병(재해) – 유언비어 – 차별이라는 구조를 통해 사회적 소수집단이 차별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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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이러한 상황은 아직 근대 사회가 되기 이전에 발생한 것이기에 관동대지진 당시의 유언비어와는 조금 거리를 두어서 생각해야 할 사안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나라 때 백련교도들이 콜레라 유포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나,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흑사병의 주범으로 몰린 것은 당시에는 전염병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나 사건을 규명하기 위해서 다소 비논리적이거나 신이적인 설명을 붙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백련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다소 악의적인 유언비어가 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염병 – 유언비어 – 차별’이라는 구조는 전근대 사회에서만 마냥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근대화를 이룩한 20세기 유럽 사회조차도 이러한 구조는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근대화를 통해 정립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체제는 이러한 구조를 허물어뜨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이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2,000만여 명에서 최대 1억 명까지로 추산되었고, 한국에서도 15만여 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한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질병은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명과는 다르게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질병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스페인 독감을 두고 독일계 이민자들이나 동유럽, 남유럽계 이민자, 혹은 흑인들이 독감을 전염시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통계적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의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실제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나 흑인들은 미국 사회로 유입된 역사가 짧아, 다른 민족 집단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은 자연스레 이들 집단이 독감에 자주 걸리는 집단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흑인의 경우에는 인종 분리정책으로 인해 흑인 전용 병원이 부족해 20세기 초까지 사망률이 타 집단에 비해 2, 3배 높은 실정이었습니다. 

원인이 사회적 조건에 기반하고 있었음에도,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통계를 내세우면서 흑인들이 도시로 이주해 독감을 퍼뜨린다는 소문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통계 조사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미국 흑인 사회는 스페인 독감 대유행 당시 위생과 의료 시설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흑인 여성들이 간호사나 자원봉사자로서 활동했으며, 협회 설립을 통해 흑인들의 위생 수준을 개선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결실을 거두어서, 대규모 흑인 공동체 7개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사망률이 백인들보다 낮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이 독감을 퍼뜨리는 주범이라는 신념을 버리고 싶지 않은 자들은 스페인 독감은 흑인들이 잘 걸리지 않는 질병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합리화하거나 두 귀를 틀어막으며 이를 부정하기에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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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도 시행되는 방역법인 ‘검역’ 역시 사회 집단 간의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19세기에 동북아시아를 강타한 콜레라는 유럽으로도 퍼져나갔다. 러시아는 콜레라가 처음으로 퍼진 유럽 국가였습니다.

1829년에 오렌부르크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이듬해에는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덮쳤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검역소 설치와 피해자 격리, 상인들의 이동식 주택 차단을 명령함으로써 질병의 전파를 제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격리는 민중들에게 강력한 반발을 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일반 민중들의 생활을 과도하게 침해할 뿐만 아니라, 상류층과 중산층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일반 서민들을 배제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콜레라가 비위생적인 환경에 거주하거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더 빠르게 전파되었기에 하층민들의 상류 계층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하층민들을 배제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강압적인 격리 정책으로 인해 하층민 중에서 10여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폭동으로 인해 관공서, 학교, 문화 시설 등이 폐쇄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1831년에는 폭동을 일으킨 하층민들이 수도의 콜레라 병원을 습격해 의사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동은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무력 진압을 한 끝에서야 잠잠해질 수 있었습니다.

영국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콜레라를 사회적 계층과 관련시켰고, 하층민들은 콜레라가 자신들의 과도한 인구를 감소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 중산층에 대한 폭동을 감행했고, 사회는 콜레라 감염자들은 대부분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거주하는 하층민들이라면서 하층민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습니다.

근대 시기에 접어들면서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많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안들이 모색되었습니다. 
통계 작성을 통해 질병의 근원지를 알아내고 피해 상황을 분석하는 한편, 검역을 통해 전염병의 확산을 조기에 제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재해로 인한 사람들의 비이성과 이기성까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전염병 확산의 원인을 사회 내에 있는 소수집단이나 약자들에게 돌리며, 이들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인식을 쏟아냈다. ‘과학’과 ‘통계’라는 객관적인 지표는 오히려 그들의 비이성적인 신념을 강화하는 데에 활용되었습니다.

팬데믹(Pandemic, 전염병 대유행) 현상은 일상의 영역을 비일상으로 전염시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도 – 마치 전쟁이 터진 것만 같이 – 다른 사람, 다른 집단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자신이 그동안 기저에 숨겨왔었던 편견과 혐오가 여과 없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백련교도, 유대인, 나병 환자, 독일계 이민자, 흑인, 하류 계층 등, 누구도 질병을 옮기는 직접적이고 주체적인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누명을 썼을 뿐이거나, 자신들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전염병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 내에서 소수였기에, 사회 대다수에 의해서 질시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는 성공공식으로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