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때 인조는 뭐했을까?

어쩌면 조선의 가장 치욕스러운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인조때의 병자호란.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압도적인 군세 앞에 수도를 버리고 피난 간 적은 있을 지라도, 끝끝내 버티며 적들을 몰아냈었던 조선이, 처음으로 왕이 직접 나와 머리 박고 항복 선언을 한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항복을 했던 왕 인조에게는 이 전쟁의 모든 욕받이를 담당하게 되면서 당시 정권에 대한 비난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오히려 정작 전쟁을 일으킨 홍타이지와 청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다, 당연하다, 참교육이라는 여론마저 생길 정도구요.


그렇다면 인조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그들은 인조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알고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접해본 사람들 중 대다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겠죠.

일반인들이 역사를 굳이 그렇게 세부적으로 공부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필수 과목화된 역사 교과서나, 아마 학생들에게 교과서보다 친숙할 EBS에서는 전쟁에서 패배한 경위보다는, 전쟁을 이끌어낸 외교와 호란의 영향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조가 무얼 했는지 알 필요도,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조는 무엇을 했을까요?
이것을 얘기하려면 호란 이전 북방 방어 전략의 변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인조

이전까지는 북방의 적이라고 해봐야 수천 단위도 안되는 부족들의 약탈에 그쳤고, 선조 시기 한데 뭉치기 시작한 훌룬(해서 여진)은 동북쪽의 여진족을 결집해 침공하다 보니 함경도 방면에 주로 힘이 실렸습니다.
이에 비해 평안도 부근의 여진은 명과의 교역을 유지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명의 군대가 코앞에 있어 문제가 될 부락은 적었죠.


때문에 평안도는 함경도에 방수군(본래 지역이 아닌 지역에 지방군을 상주시키는 것이라 보면 됩니다.
함경도가 전란으로 인력이 많이 갈려나가다보니 타 지역에서 땜빵한 것이죠)을 제공하는 역할이 주였고 평안도는 여진의 침입으로 방어하는 역할 보다는 명과의 교역, 사신 접대 등이 주 담당이었습니다.


문제는 명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약화되었고, 평안도 근처인 건주 여진이 힘을 키워 여진을 차례차례 흡수해나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건주 여진이 적당히 성장했을 때야 건주 여진을 이용해 군소 부족의 통제가 가능했지만(실제로 이를 위해 명 측에서 밀어준 것도 있고요),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성장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죠.


그리고 결국 명군이 더 이상 야전으로 건주 여진을 이길 수 없음을 사르후 전투로 잘 보여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됩니다.
당시 건주 여진은 요동 지역을 차지하면서, 명의 군대를 만리장성 안쪽으로 밀어 넣어 중심을 서쪽으로 옮기게 되어 본격적으로 중원 진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반대로 명나라는 이제 여진을 바로 앞에서 압박할 수단을 잃게 되면서, 무섭게 성장한 건주 여진을 통제할 방법이 사라지게 된 거죠. 


이에 따라 조선은 본격적으로 평안도 방어를 단단히 하게 됩니다.
문제는 안 그래도 거듭된 방수군으로 고갈된 평안도의 인력이 사르후 전투로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는 점이고, 애초 북방의 무게 중심은 함경도 위주였기에 평안도의 대비가 제대로 안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전부터 문제 제기는 해왔으나, 의주, 창성의 방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게 당시 상황인 것을 보면, 제대로 된 준비는 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 쓸 곳은 산더미인데, 정작 돈은 없었습니다. 
일단 전란 직후 조세가 걷히는 전결 규모가 150만결에서 30만결조차 안되는 규모로 감소한 상태인 데다가, 구휼을 위해 쌓아 놓았던 쌀은 임진왜란으로 고갈되었습니다.

거기에 광해군은 거대한 궁궐 공사를 재위 기간 내내 일으키며 재정을 고갈시켰고, 그 결과 선혜법(대동법)의 시행으로 새로운 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고갈을 호소하는 여론이 선조보다도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여러 방어 시설을 보강할 재력은 많지 않았다 하더라도, 광해군은 화기의 확충, 북방군 양성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안주성에만 6~7천의 군대가 있을 정도로(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 준수한 수준의 대비를 하게 됩니다.

또한 하삼도, 수도의 군대마저 북방에 올려 방비를 하게 하는 등, 북방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광해군 시기, 조선의 북방 전략의 방향성을 두고 광해군과 비변사가 대립하게 되는데요, 이전까지 압록강을 방어하는 것은 북방 7읍을 거점으로 근처 여진을 영향력 아래 두어 이들과 협조하여 방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평안도 근처의 여진은 대부분 건주 여진에게 흡수되었고, 명마저 만리장성 안쪽으로 물러난 상황. 더군다나 지금까지 평안도 부근은 준비도 제대로 안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광해군은 북방 7읍을 보강하는 방향보다는, 내지의 거점을 보강함으로서 촘촘한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주장이 드러난 것이 광해 13년 9월 5일 계묘 4번째기사 입니다.
반면, 비변사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안주성은 위치상으로는 요충지이긴 하나, 평지성이기 때문에 수비에 용이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비해 압록강을 끼고 싸우는 북방 7읍의 이점은 말할 필요도 없죠. 게다가 기병 중심인 후금군이 진격하기 용이한 의주와 창성은 안주성 못지 않게 그 중요도가 높은 곳입니다.

실제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모두 진격로에 의주성이 포함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를 부실한 상태로 내버려 두고 안주성을 강화한다면, 각개격파 당하기 용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의주, 창성조차 제대로 방비가 안되어 있는 주제에 안주성을 강화해 촘촘히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겁니다.


물론, 광해군의 지적이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내지 방어를 튼튼히 해 종심이 깊은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뭐 아주 기본적인 지적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비변사도 의주와 창성은 이제 어느 정도 두서가 잡혔을 테니 능한산성을 방비하려 했었다며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광해군이 파병을 막기 위해 내지 방어를 주장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 글에선 방향이 조금 틀어질 수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방수군의 문제점이 제기되었고,(광해군일기[중초본] 144권, 광해 11년 19일 무술 북방의 실태에 대해 제대로 된 문제 인식이 이루어지는 등, 호란에 앞서 주어진 과제가 많음을 인식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가 즉위하고, 사태는 더욱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우선, 쿠데타로 인해 잠시 정국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광해군 시기 밥먹듯이 이뤄졌던 옥사로 인해 당시 궁의 분위기는 의심만이 가득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북방 방어선을 튼튼히 하기는커녕, 왕이 주도적으로 무언가 진행하기 어려운 환경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관리들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환경은 이후 군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후금에서는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강경파 홍타이지가 즉위했죠. 누르하치의 카리스마에 의해 통합되었던 후금은 홍타이지의 즉위로 분열이 일어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고, 누르하치가 유언으로 버일러와 잘 협의하여 정책으로 진행하라고 한 만큼, 홍타이지의 권위는 누르하치보다 훨씬 축소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외부 원정을 통해 현재 문제인 식량난을 해소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고, 이전부터 면밀히 정보를 수집해왔던 조선에서 이를 모를 리 없었습니다.
실제로 광해군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지나칠 정도로 북방을 신경 쓰며 북방군을 확충할 정도였죠.


우선 인조가 한 것은 이전의 폐습(권문 세가의 농소인 “진”을 해산하고, 방납의 폐단을 단속하며 대동법 확대를 논의하며 악명 높은 내수사 노비들을 일부 속오군에 충정시키는 등)을 정상화하고 백성들을 휴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서북 변방에서 축성을 해야 함을 알지만 농한기로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군사보다 심각한 것은 재정이었는데, 쿠데타 이후 군적 확보를 위해 호패법을 논의하려 할 때, 민간의 휴식을 이유로 호패법은 실시할 수 없었고, 군량 확보를 하고자 하여도 “1년 경비가 11만석인데 지금 수납한 것이 10만석이다”라고 할 정도로 당시 재정 상황은 심각했습니다.(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4월 25일 갑신)


즉, 당분간 민간 휴식 및 양식 확보라는 군적 확보 이전의 기본 문제조차 해결하기 급급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쌀이 없는 데 군적을 확보하면 뭐하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도 나름 이전부터 준비해왔던 서로의 북방군 3만을 중심으로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이괄의 예비군 1만에 방수군 5천을 확충하여 1만 5천의 예비대를 구성,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여 후금군 상대로도 야전이 가능할 정도의 규모를 확보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외에도 이러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쌀을 사들이며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괄의 난이 터지면서 인조 시기에 급박하게 준비한 것은 물론, 광해군 시기에 준비한 것마저 전부 날아가 버리는 대참사가 터지게 됩니다.


약 13000명의 정예군이 일으킨 반란. 기존에 인조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 훈련시켰던 휘하의 북방군에 고향과 떨어져서 생고생을 하며 대우도 거지 같았던 방수군이 상당수 동조하며 빠른 속도로 수도로 진군했고, 이 반란은 그나마 간신히 구축한 북방 방어선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선 13000명의 군적을 비롯한 평안도의 상당수의 인력이 사라졌으며, 정부군 측 또한 이들을 막아내기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는 가뜩이나 인구도 적은데 거듭된 방수와 파병으로 고갈되어 타 지역의 방수군으로 땜빵을 해야만 했던 서북변 방어에 크나큰 인력 고갈을 야기하게 됩니다. 

이괄의 난 직후 정충신은 6~7천에 달했다던 안주성의 병력이 대략 2천 밖에 없으며 3~4천은 있어야 지킬 수 있다며 병력 공백을 지적할 정도였죠.
내지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광해군의 노력의 결정체(?)라고 볼 만한 안주성이 이 모양이었으니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인조가 실록에서 군사 양성보다 삼국지연의마냥 장수 뽑기에 열중했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는데, 이러한 발언은 당시 북방군 인력이 대거 소실된 상황에서 그나마 개선될 여지가 있는 것은 인사 부문이며, 군사 훈련 또한 장수의 재량이 어느 정도 작용한다는 점에서 인사에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시당초 군사 훈련을 하기 위한 기본 준비부터가 부실한 상황에 군사를 뽑기도 힘들고, 뽑아도 유지를 못하는데 뽑아봤자 뭐하냐고 장만이 지적한 것을 보면 답이 나오죠.
더욱 큰 문제인 것은 이괄의 난 과정에서 북방군의 주요 장수들이 죽거나, 힘을 잃게 됩니다. 

더군다나 조정 내에서도 북방군을 지지해주던 여론이 힘을 잃어 이후 상당수의 북방의 무관들은 건강이 심해서인 사람도 있지만 한직을 머물거나 많은 장수들은 심한 견제 속에서 간신히 관직을 유지하기에 급급했고, 이괄의 난 당시 활약했던 장만, 정충신 등의 장수들이 활약하긴커녕 기록에서 잠시간 사라지며 그나마 나오는 것이 골골대는 내용, 혹은 벌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이 대다수죠.

정리하자면, 당시 조선의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1. 평안도의 인력은 이전부터 꾸준히 고갈되어 왔던 상태로, 광해군 시기부터 방수군을 통해 겨우겨우 땜빵해서 방어체계를 꾸리던 상황. 그런데 이괄의 난으로 상당수를 잃은 상태. (참고로 방수군을 북방군을 묶어두기 위해서 방수군 규모의 곱배기 이상의 물자를 들여야 했으며, 방수군 자체도 고향을 떠나 근무한다는 것에 의욕도 떨어지고 불만이 가득해 내란에 협조할 정도로 충성심이 떨어집니다. 굉장히 비효율적이었죠)
2. 심지어 군량도 바닥나 군대를 뽑아봤자 유지하지 못한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 군대를 지금 당장 훈련해야 할 상황에 군량부터 준비해야 됨.
3. 광해군 시기의 무리한 재정 낭비로 북방군 확충을 위한 자원은 커녕, 관리들 월급 주기도 급급했던 열악한 재정 환경
4. 그리고 금방이라도 한반도로 내려올 것만 같은 여진족의 상황을 조선 측도 인지.
5. 북방군을 강화하자는 여론이 점점 밀려나는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는 결국 이전까지의 방어 전략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게 되는 데요, 이것은 다음 편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는 이슈스데일리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