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과 한산도대첩1편

이순신

오늘은 이순신장군과 떠오르는 한산도 대첩에 대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의 기록 가운데, 세계 역사학자들은 종종 역사에 길이 남을 전쟁과 전투를 재조명 시키곤 합니다.
그 가운데, 전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세계 역사적 가치가 있는 4대 해전>을 종종 말하곤 하는데, 바로 이 세계 4대 해전에 모두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수의 학자들이 그 네 개의 유명한 해전들 중에서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으뜸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생각을 달리 하시는 분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몇몇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교육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순신 장군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또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죠.
하지만 그 한산도 대첩이 의미하는바가 대체 무엇인지, 그 한산도 대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사실, 그렇게 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한산도 대첩이 임진왜란 3대첩 중에 하나이자,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4대첩 중에 하나이면서도 세계 4대 해전에 포함되고 동시에 그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여김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이유를 정확히,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많은 길을 돌아가고자 합니다.

전후 상황을 비롯하여 다른 세부적인 것 까지도 언급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겠네요.

1.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1592.7.7.) 전의 전란 상황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전투일이었던 7월7일 이전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전란이 발발했던 1592년4월13일(4월14일로 여기는 경우도 있음) 일본은 부산을 가장 먼저 공격하여 전란의 거점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조선 전쟁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란 전 일본이 한참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절, 조선에 뿌려진 수많은 첩자들의 보고를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및 군수뇌부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200년이나 되었다는 나라가 완전이 개판이었기 때문이죠.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 군대도 없었거니와,(전라도 여수에서 전쟁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영웅은 찾아내지 못했던 듯) 이를 적절히 관리 통제해야 할 조정에서는 동인과 서인들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있었을 뿐, 백성들을 위한 정치란 없어보였습니다.




반면 자신들에게는 이십만이 넘는 정규 군대가 존재했었으며 이들 모두 내전으로 인해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병사들이었습니다.
하여 일본은 전쟁 전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을 병참기지화 시켜 명나라와의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문약하기 짝이 없는 조선과의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최단시간 내에 일본이 대조선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선조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선조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반도 전역에 땅따먹기 싸움을 위해 군대를 보낼 필요가 없으니 힘도 덜 소모하겠죠.

바로 이것이 일본의 대조선 전쟁 제1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일본이 매우 합리적인 전략을 세운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전략이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 그런지는 차차 드러납니다.

그렇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전달된 전략 지침에 따라 가장 먼저 부산에 상륙한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길 따라서 한양만 보고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매서운 기세로 북상하기 시작하는데 경상도의 최고 지휘관들 이었던 경상좌병사, 우병사, 좌수사, 우수사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패퇴하거나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을 이탈합니다.

경상도에서 초기에 전란을 막아내지 못한 이유에는 당시 조선의 방어지침 이었던 <제승방략체계>도 한 몫을 하는데, 터무니없는 그 방어지침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겠습니다.

한편, 몇몇 성주들은 목숨을 걸고 관민이 힘을 모아 왜군을 막아보았으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습니다.





왜군은 기세를 몰아 한양으로 진격하는데 저 유명한 충주의 탄금대에서 당시 조선의 영웅이라 불렸던 신립과의 일전을 벌입니다.

이 싸움에서 신립은 지금까지도 길이 회자되고 있으며 논란거리인,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다 패합니다.
싸움이 패배 쪽으로 기울자 자신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립이 이끄는 군사들이 조선조정 입장에서는 최후의 방어선 이었다는 점입니다.

신립 자체도 영웅대접을 받아왔거니와, 나름대로 병사들을 수천 명 끌어 모아서(대략 8천으로 추정) 벌인 일전이었기에 조정에서도 내심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참패였죠.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전사하자 1군 선봉장 고니시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한양까지 진격합니다. 바로 그들의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내려준 대조선 전쟁 전략의 마무리 단계에 임박했던 것이죠. 조선왕을 사로잡을 시간이 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야말로 일본군 전체를 화들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죠.

바로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설마설마 하였지만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 임진왜란 이전 일본이 수십년 동안 통일전쟁일 치루는 동안, 그들 나름대로의 철칙이 있었습니다.

성주는 결코 자신의 집인 성을 버리지 않는다.
성이 공격받는다면 그 성에서 운명을 다할 지언정, 결코 자신의 집과 백성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철칙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200년이나 유지되어온 일국의 왕이, 나라의 수도이자 자신의 집인 대궐을 버리고 도망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성으로 도망치던 그 선조가 그런데 또 평양으로 도망칩니다.

계속 쫓아가서 평양까지 점령해보니 이제는 신의주까지 도망쳐 버리고 없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죠.

바로 이 시점에서 일본군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첫째는 보급의 문제였고, 둘째는 명나라의 문제였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전쟁을 하는데 있어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입니다.

당시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병사만 해도 1만 5천이 넘었습니다.
그 인원이 계속 진군하면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식량이 끊임없이 보급되어야 합니다.
하물며 활을 쏘면 화살이, 조총을 쏘면 탄약과 화약이 계속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보급거점과의 거리입니다.

당시 일본의 모든 물자는 본국에서 배를 통하여 보내져 부산에 들어오게 됩니다.
부산에 떨어진 물자들은 육로를 통해 전방에 있는 전투부대에 보내지게 되는데, 당연히 부산으로부터 멀리 진군할수록, 보급거리는 멀어집니다.

보급 거리가 멀어질수록 고니시의 제1 선봉군은 보급에 차질이 생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처럼 도로가 나있던 것도 아니고,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일반 사람이 걸어서 3주에서 4주정도 걸리는 길이가 한양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였습니다.

하물며 평양까지 진군한 고니시의 군대. 부산으로부터 2000리 거리였습니다.
보급은 까마득한 일이었죠.


두 번째 문제는 명나라의 문제. 한양에서 선조를 사로잡으면 그걸로 빨리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건만, 선조가 도망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만약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면 일본 입장에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고니시가 평양 이북으로 계속 진군하고자 하면 명나라를 더욱 자극하는 셈이었으니, 이러한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고니시는 진군을 멈춥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의 일본군의 해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길은 오직 한 가지 뿐, 바로 바닷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배의 특징 때문이죠.

좀 전의 보급문제를 다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

일본의 수송선 한 척을 가정합니다. 이 한 척의 수송선이 식량을 가득 싣고 부산을 출발해 남해와 서해를 거쳐 지금의 인천이나 남포까지 이르는데 빠르면 3일, 길게 잡아도 7일이면 갑니다.

그 한척이 제1군 선봉장 고니시의 1만5천 군대가 3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수송합니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하지만 동일한 양을 육로로 수송하려면 마차가 100대, 그것을 끌 소나 말이 100필 또는 100마리, 그 말이나 소를 이끌 인원이 필요하고, 불의의 기습에 대비하여 이 수송단을 호위할 병사들이 붙여져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3주에서 5주의 시간이 걸립니다. 육로와 수로의 차이는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여 만약 바닷길이 확보되어 부산에서 인천 또는 남포에 이르는 항로가 보장되면, 일본은 전란 초반과 같은 무서운 기세로 북상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보급문제 뿐만 아니라, 지원군도 원활하게 도착할 수 있을테죠.

바로 이렇기에, 일본군에게는 바닷길이 절실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수군은 당시에 뭘 하고 있었을까요? 일본 수군은 전란 초기부터 육군처럼 진군할 수 없었습니다.왜냐하면 본국으로부터 실어 날라야 하는 병사와 물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죠.

제1군 고니시의 군대야 선봉대이니 상륙하자마자 제일 먼저 북상한 군대라 치고, 고니시의 1군 뒤로는 2,3,4,5,6,7,8,9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의 병사들이 상륙했습니다.

10만이 넘는 그 군대와 전쟁수행에 필요한 수많은 물자를 나르느라 일본 수군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영웅 이순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그럼 과연 자국의 수도인 한양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질 때까지 우리 이순신 장군과 그가 이끄는 전라좌수군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계속 보고싶으시다면 이슈데일리 즐겨찾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