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 몽고와 고려의 전쟁 그 진실

우선  몽고 군대가 고려를 침입한 30여 년에 가까운 시기가 참 뭐라 표현해야 할까… 유독 심하게 병맛이 느껴지는 시기라고 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비하면 침략자의 양적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권황제 살리타이가 고려로 침입했을 때 이끌고 온 규모가 3만, 이후 규모는 점점 줄어들면서 1만의 몽고군이 고려를 침범하기도 합니다만, 문제는 몽고군의 양적 규모는 점점 갈수록 줄어들지만 그 피해는 누적되면서 더 심각해진다는 점이죠.




 물론 당시 고려 육지에 제대로 된 정규군이 거의 존재하지 않거니와, 몽고군이 1-2차 침입 때 고려군의 북계 지역과 서해도, 그리고 내지를 공격해 상당히 피해를 주었기에, 1-2차 침입의 규모에 비해서 더 많은 병력을 굳이 고려에 동원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몽고군으로 인한 피해는 더욱 극심해서 고려는 전쟁 기간 동안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사료 내용을 다 뒤져봤는데도 불구하고 1차 침입 이후로는 정규군의 제대로 된 활동(1차 침입 때는 채송년의 3군 출동)을 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더욱 문제는 무책임하고 무계획으로 강도(江都)로 천도했던 최우라는 작자입니다.

몽고와의 전쟁




 최우는 몽고군의 침입으로부터 자기의 권력이 위험해질까 –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 강화도 천도를 결정합니다.
그 예로 몽고군의 태도 변화를 들 수 있겠죠. 몽고는 고려에 자주 드나들면서 국왕인 고종을 최고로 권력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것이었죠. 하지만 몽고군도 점점 고려 내부를 드나들면서 고려 사정에 밝아지게 되고, 그리하여 고종이 아닌 최우가 고려의 최고 권력자로 행세하고 있었음을 눈치를 채게 됩니다. 몽고가 고려에 보낸 편지에 최우를 영공(令公)으로 지칭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최우는 당연히 불편한 낌새를 내비추었고, 편지의 답서에 “나는 영공(令公)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불편한 속내를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우 입장에서는 굉장히 속이 타는 것이었습니다. 저것들이 다시 침략해서 고종의 항복이나 입조가 아닌, 최우 자신의 항복과 입조를 요구하게 된다면 자신이 고려 천하에서 누렸던 권력들이 위협을 받는 것은 자명하였습니다.

최우가 누굽니까?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버지 최충헌과 똑같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전자전’이 여기에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제서야 최우는 진지하게 대신들과 몽고군의 침입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했고, 강화도 천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오고가게 됩니다.

그리고 뜻밖에 강화도 천도를 공포하면서 신료들이 충공깽에 빠지게 되었죠.




 물론 반대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강화도로 피하지 않으면 자기의 권력이 위협을 받는 것은 – 최우 입장에서 – 자명했기에 반대파의 의견은 무시하였습니다.
야별초지유 김세충은 강화도 천도에 반대하고 대신 개경을 고수하면서 몽고군과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최우는 그를 참수했습니다.
옆에 있던 대집성이 최우를 꼬드겨서 참수하라고 은근히 부채질했죠.

참고로 이 대집성이란 인간이 누구냐면 몽고의 1차 침입 때 안북성 전투에서 고려 정규군을 말아쳐먹은 XX입니다.
최우는 나중에 대집성 딸을 맞이하면서 처로 삼기도 합니다.

측근이란 인간도 정상은 아니네요.
참고로 대집성이란 놈이 자주성에서 큰 활약을 펼쳐 몽고 군대의 발을 묶어두었던 최춘명을 죽이라고 최우에게 은근히 권유합니다.
최우는 대집성의 말을 듣고 자주성의 영웅인 최춘명을 죽일려고 했지만, 이게 왠걸? 적국인 몽고 관리(?)에 의해서 최춘명은 목숨을 부지합니다.




 그래요 뭐. 후대의 우리가 최우가 당시 어떤 심정으로 강화도 천도를 결정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구국을 위한 결단일 수도 있고, 아니면 –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 자기의 권력을 위해 강화도 천도를 결정했을 수도 있죠. 근데 그 이후의 일들을 보면 전자를 위한 행동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최우는 천도를 결정하고 나서 수레 100여 대를 징발해서 자기 재산과 가족부터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개경 시내에 포고문을 내려 정해진 시간까지 준비를 하고 강화도로 이주하라고 했죠. 그리고 병사들을 보내 강화도에 새 궁궐을 짓게 합니다. 그리고 육지 사람들에게는 무책임하게 ‘각자 수령의 명령에 따라 섬이나 산성으로 피난해라.’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강화도로 도망가겠으니, 너희 육지 사람들도 알아서 피하라는 말이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무책임하게 저런 발언을 뚝 던지고 자기는 몸을 보존하다니, 당시 고려의 최고 권력자 행세를 하는 사람치고는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수뇌부들은 안전한 곳에 피해서 후방에서 전쟁을 지휘해야 합니다. 수뇌부들이 몰살당하면 끝이니 ;; 근데 문제는 그렇다고 최우가 강화도에 들어가서 몽고군에 대적하기 위한 중장기적인 전쟁 계획과 전략을 구사했느냐고요? No~




겨울 10월 경인일에 최우를 책봉하여 진양후(晉陽侯)로 삼았다. 이 보다 먼저 왕이 조서를 내려, “최우의 천도한 공은 후로 봉하고 부(府)를 세울 만하다.” 하니, 백관이 모두 그 집에 가서 하례하였다. 왕이 을해일에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최우가 조서를 맞을 예물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사양하므로 이 날을 택한 것이다. 이에 주와 군에서 다투어 선물을 바쳤다. 우가 제 집을 짓는데, 도방(都房)과 사령군(四領軍)을 모두 부역시켜 배로 옛 서울 송도의 재목을 실어 오고, 또 소나무ㆍ잣나무들을 실어다 집의 동산에 심은 것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그 원림이 넓기가 무려 수십 리였다.




12월에 최이(최우)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또 안양산(安養山)의 잣나무를 옮기어 집의 후원에 심었다. 안양산은 강도(江都)에서 여러 날 걸리는 거리인데 문객인 장군 박승분(朴承賁) 등으로 감독하게 하였다. 때는 추위가 한창이어서, 일꾼들 가운데 얼어 죽는 자도 있어 연로에 있는 군현(郡縣)의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그 소요를 피하였다. 어떤 사람이 승평문(昇平門)에 방을 써 붙이기를, “사람과 잣나무 중 어느 것이 중하냐.” 하였다.




8월에 강안전(康安殿)을 개창하여 최이가 황색 비단으로 후벽을 꾸미고, 장군 최환(崔峘)을 시켜 무일편(無逸篇)을 쓰게 하였는데, 상을 내려줌이 매우 많았다. 환은 대경(大卿) 임경순(任景純)의 아들이었는데, 최이가 길러서 아들을 삼고 성을 최로 고치었다. 환이 글씨를 잘 쓰므로 이가 애지중지하였다. 성질이 탐욕이 많고 비루하여 세력을 믿고 방자하여 횡포하였다.




 육지에서는 몽고군의 침략이 버젓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의 고려 정부, 정확히 말하면 최우는 사치스러운 행각들을 벌였습니다. 육지로 사람들을 자주 파견해서 진귀한 것들을 실어오게 해서 강화도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화려하게 꾸밉니다. 그 과정에서 목재를 실어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묵념 그리고 이 시문을 봐보시죠.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5 고율시 89수




 참 답이 없습니다… 육지에 있는 백성들은 강화도에 있는 최우와 고관들의 입장에서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죠. 당연히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목숨을 위해서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도망치거나 곧 싸우는 것이었죠. 하지만 도망친다고 해서 마땅히 도망할 곳도 없었습니다.

전쟁 중후반기에는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몽고군이 활동하게 되면서 육지 내에서는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습니다. 산성, 아니면 섬으로 피해야 했죠.

섬으로 피한다고 해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몽고군의 칼이야 피할 수 있었겠지만, 식량이 충분하겠습니까? 물론 몇몇 섬에서 식량 및 식수 공급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지만, 그건 지극히 일부 사례일 뿐, 섬으로 피난한 백성들은 여전히 고통에 쩔어야 했습니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논밭이 불태워지고, 게다가 흉년까지 더해져 최악 ;;




 더 이상 이 불쌍한 백성들은 대부분 전무후무한 정규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인근 수령의 인솔하에 산성에서 농성을 해서 버티거나 섬으로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최씨 일가들이 백성들을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냐? 또 그건 아닙니다.

몽고군의 피해를 받지 않은 지방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세금을 뜯어오게 합니다.




 심지어 최씨 일가들이 파견한 이 관리들이 현지에서 자의적으로 형을 집행해 백성들을 죽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부당한 처사와 누적된 백성들의 분노는 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재밌는 것은 몽고군의 침공 때 정규군과 자신의 사병을 적극적으로 보내지 않았던 최우였지만, 민란이 터지면 정규군을 출동시켜서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도대체가 이게 무슨 전쟁입니까? 육지에는 제대로 된 정규군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몽고군을 막아낼 제대로 된 전선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죽주성이나 춘주성 항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안찰사나 토착 수령들이 백성들과 함께 몽고군을 막다가 전부 몰살당하는 처지로 이어지게 되죠.




 정규군도 전선도, 그리고 백성들을 지킬 정부도 존재하지 않는 이 이상한 전쟁에서는 차라리 항복하는게 나을 정도였습니다. 지방에서는 일부 수령들이나 방호별감들이 백성들을 규합해 몽고군에 대항하기는 했지만, 그 힘은 중과부적이라고 표현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성이 함락되면 몽고군에게 철저히 보복을 당했죠. 양산성 전투에서는 방호별감 권세후가 몽고군에 대항했지만, 힘이 다해서 자신은 자살하고 양산성 내에 방치된 백성들 4,700여 명이 몽고군에게 모조리 도륙당하게 됩니다.

이건 뭔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할지… 아니면 살기 위해서 투항해야 할지…




 그래서 이후 전쟁이 계속 될수록 몽고군에게 자진하여 항복하는 사례가 늘어납니다. 심지어 육지뿐만이 아니라, 몽고군으로부터 안전한 섬에서도 섬을 책임지는 관리를 죽이고 몽고군에게 투항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몽고군은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고, 비교적 당장 목숨은 살려주었습니다(물론 투항한 백성들 역시 몽고군의 인간 방패나, 무리한 물자 징발에 동원되기는 했었을 겁니다…).




 애초에 무책임하게 육지 백성들을 던지고 강화도로 튄 최우입니다. 그런 최우가 과연 육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게 무리일 것입니다.
아무튼 육지 백성들은 방치되고, 제대로 된 정규군도 존재하지 않기에 이들은 몽고군의 직접적인 살육의 대상이 되거나 포로가 되기에 이릅니다.

고려사절요에는 무려 1년, 즉 한 해 동안 206,800여 명이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히며, ‘살육당한 자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오히려 몽고 사신측이 고려의 당시 형편을 걱정(?)할 정도가 됩니다.




 “아니 국왕 전하, 육지에서는 고려 백성들의 간과 폐가 떨어져 있는데, 국왕 전하라고 하시는 분께서 어찌 강화도에 쳐박혀 이러고 있나염??? ;; 차라리 그냥 항복하시죠…”




 그렇다고 항복할 최씨 일가들이 아닙니다. 애초에 육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계획도 없이 자기들의 안위만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몽고 사신이 뭐라고 하든, 그리고 육지 백성들이 죽든 말든 그건 최씨 일가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저 몽고놈들이 설마 강화도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어? 그런거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우린 강화도에서 띵가띵가 놀자!




  최이가 8일에 연등하면서 채붕(綵棚)을 만들고 기악(伎樂)과 온갖 잡희를 베풀어 밤새도록 즐기니, 성중의 구경하는 사녀들이 담장처럼 빙 둘러 서서 구경하였다.




5월에 최이가 종실의 사공(司空) 이상과 재ㆍ추들을 위해 그 집에서 잔치하였다. 이 때 채색 비단으로 산을 만들어 비단 장막을 두르고 가운데 그네를 매었는데, 문수(文繡)ㆍ채화(綵花)로 장식하였다. 또 팔면(八面)을 은단추와 자개로 꾸민 4개의 큰 분(盆)에 각각 얼음 봉우리가 담겨 있고, 또 4개의 큰 물통에 붉은 작약과 자줏빛 작약 10여 품(品)을 가득히 꽂았는데, 빙화(氷花)가 서로 비치어 겉과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였다.
기악과 온갖 잡희를 베풀고, 팔방상(八坊廂)의 공인(工人) 1천 3백 50여 명이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 들어와 풍악을 연주하니, 거문고와 노래와 북과 피리의 소리들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팔방상에게는 각각 백은(白銀) 3근씩을 주고, 영관(伶官)과 양부(兩部)의 기녀(伎女)와 광대에게도 각각 금과 비단을 주니, 그 비용이 거만(鉅萬)에 달하였다.




 예… 애초에 최우는 오직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서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 자명한 듯 합니다.
이 전쟁은 애초에 이기기 위한, 국토를 방어할 ‘전략’ 따윈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놈들만 믿고 살고자 했던 육지 백성들은 안습… ㅠㅠ… 대몽 항쟁은 국가 전략 따윈 없었고, 그저 최우를 위시로 한 기득권 세력들은 자기들 안위를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육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그 어떠한 조치도, 그리고 몽고군을 격퇴할 그 어떠한 전략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최씨 일가의 사병들이 육지에 파견되어 소규모 유격대를 파견하여 소소한 공적을 세우거나 아니면 전멸당하는게 부지기수인 듯 합니다. – 이 역시 최우의 행동에 보다못한 장군들이 나선 ;; – 이런 최우를 무슨 구국의 결단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했다느니… 모 MBC 드라마에선 최씨 일가 수장들을 ‘개혁의 선구자’라고 미화했더군요 ;;




 대몽 항쟁은 고려의 엄청난 피해로 끝났지만, – 참고로 동진국이란 나라도 고려의 동계 지방을 자꾸 침입함 – 되면서 고려는 일본 원정에 많은 군사와 물자, 그리고 함선을 건조하고 이를 바치는 등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합단적의 침입에 노출되어 최전선이 돌파당하고… 이후에는 홍건적과 여진, 그리고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도저히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이미 암 판정을 받고 말기 상태에 들어간… ;;

 의외로 고려뽕들은 자기들도 이 부분이 흑역사라고 생각하는지 이 부분은 언급도 하지 않더군요.
선조는 명에 sos 던져서 명군의 도움을 받아 전세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인조는 선조처럼 잘 튀지는 못해서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남한산성에서 했던 행적들을 보면 병사들을 독려하고 유공자를 치하하는 등, 또한 눈물 연기(?)를 하는 등 의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후 인조의 행적과, 인사 문제는 무시 그런데 대몽 항쟁 당시 고종은 허수아비니 그렇다 치더라도(고종도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최우를 비롯한 최항, 최의… 이놈의 실질적 권력자들은 뭘 했을까요???

더 많은 역사이야기는 성공공식에서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