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13대왕 근초고왕에 대해 알아보자

백제 13대왕 (?~375) 근초고왕

은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백제에선 영웅급 왕입니다.

근초고왕

삼국시대 3대 정복군주를 꼽는다면, 고구려 광개토태왕, 신라 진흥왕, 그리고 백제에서는 단연코 근초고왕이다. 서기 346년에 즉위하여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복활동외에 역사서 편찬, 수도의 확장, 해상 무역 발전등 다방면에 업적을 남긴다. 또한 백제 초기에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 집권제로 백제를 고대국가로 완성한 왕으로도 평가받으며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했다.

이름은 여구(餘句)다. (성이 “여” “구”가 이름). 그는 체격이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지만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왕호인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의 경우는 5대 초고왕과 6대 구수왕에서 왕호를 따온 것이다. 왕호가 닮은 것의 이유는 백제 역사중 온조(溫祚)와 비류(沸流) 두 사람이 있는데, 1대부터 7대 사반왕까지는 온조왕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사반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쫓겨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다. 고이왕은 4대 개루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개루왕은 166년, 고이왕은 286년에 죽는다. 그가 무려 120살 이상 살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고이왕의 성씨는 우(優)씨였다. 백제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니 고이왕은 온조의 후손이 아니라, 비류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초기 백제는 온조와 비류 두 사람의 후손이 서로 왕위를 교대로 했는데 근초고왕 이후 온조의 후손이 독점한다.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단일한 왕통을 확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근초고왕은 진(眞)씨 귀족과 혼인을 맺고, 진씨 가문의 지지를 받는다.

그가 즉위한 4세기 동아시아는 진(晉)나라가 316년 양자강 유역으로 쫓겨났고, 각축장이 되어, 수시로 나라가 세워졌다가 망하기를 거듭하였고. 남중국으로 쫓겨난 동진도 있고, 고구려는 313년과 314년 낙랑과 대방을 멸망시키고, 서방으로 진출을 서둘렀다.

당시 백제의 영역

백제는 3세기 중엽부터 대방군을 통해 중원지역의 문물을 수입하고 이를 주변국가에 나눠줌으로써 이득을 챙겼는데 대방군이 사라지자, 백제는 중원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해양 활동에 나서야만 했고 이에 고구려와도 충돌한다.

그는 먼저 남쪽으로 작은 소국들을 정벌해갔고, 마한을 실질적으로 멸망시키고, 전남 해안까지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은 아들 근구수태자와 함께 전쟁에 참여도하고 왜국의 도움도 받는데 그로인해 369년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고 그 실물이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에서 발견된 바 있다. 74.9㎝의 칠지도에는 61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왕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소식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이 명문은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한국학계는 보고 있다.

백제는 왜왕에게 검을 주면서 협력을 구한 것이고,( 일본학계는 백제가 왜국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명문 내용이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따르기 어려운 주장이다.) 가야 연맹의 소국들과 마한 세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호령한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 황해도 배천군) 지역으로 진격해왔으나 근초고왕은 근구수태자와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가 371년 다시 공격해오자, 근초고왕은 예성강변에 군사를 숨겨두었다가 다시금 고구려 군을 격퇴시켰고, 그해 겨울 병사 3만 명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맞혔다.
평양성을 못빼앗았지만 고구려왕을 죽이는 성과를 거둔다.

대륙으로 세력을 넓혀라.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

– [송서(宋書)]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해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 2군을 빼앗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梁書)]

두 개의 중국역사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에 고구려 서쪽인 요서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 
요서, 진평군은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일대와는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다. 이는 강력한 해군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 마한, 가야를 제압할 정도로 국력이 크게 강해져 있었고 해양 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였기에 근초고왕 시기에 충분히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

근초고왕릉으로 추정하는 석촌동 3호 고분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 외에도 박사 고흥을 시켜 백제의 역사서를 기록하게 했으며, 371년 수도를 한산으로 옮겨 평지에 위치한 기존의 궁성과 함께 거대한 수도권을 만들었고, 372년 진(晉)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등 외교 활동 무대를 넓혔다.

근초고왕이 개척한 길을 따라 백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대륙 동해안은 물론, 차츰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으니 그는 백제사에 큰 길을 열어준 임금이었다.

한편 근초고왕의 아들이 백제의 14대왕이되는데 근구수왕이며 역시 고구려와 큰 전쟁을 벌이며 승리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구수왕(近仇首王)은 태자로 있으면서 369년(근초고왕 24)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雉壤, 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침공해오자 왕의 명령을 받아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근구수왕이 원래 백제인이었으나 왕이 타는 말의 발굽에 상처를 입히고는 처벌이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쳤던 사기(斯紀)라는 고구려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도 신계) 서북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371년(근초고왕 26) 겨울에는 근초고왕과 함께 3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근구수왕의 재위기간에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백제를 잇달아 침공했으며,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려 했다. 고구려는 375년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376년 겨울에도 백제의 북쪽 변경을 쳐들어왔다. 그러자 근구수왕은 377년(근구수왕 3) 겨울에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구려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시 백제를 침공해왔다.

​아래는 백제에대한 중국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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