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남진 99%알아보기

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건립한 호태왕비는 담덕의 업적에 대해 잘 각인되어 있다.
이 중 비문의 2면에는 영락 10년(400) 고구려가 남진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 官兵踵躡而 越夾攻來背急追 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영락 10년 경자년(400) 광개토 대왕이 보병과 기병 병력 5만을 보내어 남거성, 신라성의 왜인 들을 물러나게 하고 임나가라의 종발성을 점령 하였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하여 과연 광개토대왕의 당시 고구려의 영역과 당시의 남진 루트에 대해 알고 싶었다. 따라서 당시 5세기 초의 삼국의 상황과 각각의 영토의 경계를 파악하였다.
이중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과 신라의 세력을 당시 전쟁의 한 단면인 수성전 즉 산성의 위치를 통해 유추하였다.

즉 당시 고대산성은 중요한 교통로와 강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성이 곧 그 국가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 비문의 내용을 가지고 남거성, 종발성이 일본의 이키섬, 후쿠오카 지역이다. 부산이다. 등등의 논란이 많고, 임나일본설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 이 글에서는 이런 논란 거리는 배제하고 명확한 사실인 광개토대왕의 신라와 남부지역으로의 남진 루트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또한 이 루트는 나의 개인적인 피셜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사에 대해 연구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그냥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밝혀둔다.

광개토대왕

  먼저 필자는 400년 당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여 군사를 대동한 고구려군의 정확한 루트를 유추하여 보았다.
광개토대왕이 즉위 한 후 얼마 안되어 영락 2년 7월에 백제의 성을 공략하고, 10월에 현재의 강화도라고 추정되는 관미성을 공격하여 수복한다.

그리고 영락 4년 백제에 공격에 대비해 7성을 쌓아 대비한다.
한번 전선을 형성한 고구려는 1년 4개월 후인 영락 6년 백제의 58개성과 7000촌을 획득한다. 따라서 황해도 지역과 경기도 북구의 예성강 까지 내려 왔다고 보고 있다.

  이후 영락 8년 동부전선의 강원도 북부(동예 지역이라 추정한다.)를 점령한다.
이러한 등거는 영서 지방의 춘천 중도유적과 홍천 하화계리 유적에서 확인된 고구려 토기와 철족에 있다.
고구려는 현재의 강릉 어귀까지 전선이 형성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경기도 북부까지 점령한 고구려 군은 한성을 크게 동쪽으로 우회하여 춘천-홍천-횡성 부근까지 남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강과 소향강을 경계로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영락 9년 신라는 왜_가야_백제 연합세력 공격으로 부터 고구려에 지원병력을 요청하고 영락 10년 400년에 5만의 기병과 보병을 신라 구원군으로 파견한다.

  광개토대왕의


고민 ….5만의 대군을 과감히 남쪽 끝으로 보낸다는건 담덕에게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오늘의 탱크에 해당하는 중장기병, 장갑차에 해당하는 경기병, 그리고 보병과 그 밖의 지원 병력 등 5만의 대군이 이동 루트를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가 점령한 서쪽 지방 지금의 충주 – 보은 – 문경 -구미를 기점으로 한 국경으로 남진 루트를 설정 하였을 것이다.자세히 살펴보면 현재의 행정구역상 강원도 영월, 충청북도 단양_제천_충주_괴산_보은, 경상북도 영주_예천_문경_상주가 포함된다.

   이러한 근거는 4~5세기로 구분되는 소맥산맥을 따라 형성되고 실제 조사된 신라 산성의 위치로 알 수 가 있다. 신라의 소맥산맥 일대의 축성은 장수왕이 한성을 점령한 475년 부터 본격화 되지만 그 전부터 국경을 유지하기 위해 산성을 축성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5~6세기 신라산성 연구에 대해 석사논문을 쓰신 백영종 선생님의 글을 참고하였다.)

  따라서 경기도 북부와 영서, 영동 지역으로 전선이 고착화된 상태에서 황해도와 영서에 집결하였던 병력과 평양에서 추가적으로 내려온 지원군을 합쳐 신라 국경 즉현재의 중부_경부고속도로 와 유사하게 남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국경 지근거리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 루트를 따라 남하 하자니 더욱 어려운 난관이 있었다.

  즉  영서 쪽은 높고 험한 태맥산맥의 등줄기가 뻗어 내려가 5만대군의 병력이 이동하기엔 한계가 있고, 보급도 원할하지 못하다. 그리고 강릉-동해-울진-영억-포함 루트를 타게 되면 태맥산맥을 넘어야하며 현재의 7번 국도를 따라 조성된 좁은 길을 수많은 병력이 일렬로 이동하기 때문에 동해안의 가야 및 왜  수군의 해상공격을 받을 위험성이 크다.

그리고 512년 지증왕 당시 이사부에 의해 복속된 우산국!!이라는 독립적인 나라가 울릉도에 위치하고 있어 고려구의 남진을 껄끄럽게 생각하여 배후에서 공격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5만대군은 강원도 영서 지역의 원주방면으로 우회하여 충주-문경-구미-대구-영천-경주에 이르는 경부내륙-경고속도로 루트로 진군하였을 것이다. 그럼 지점별 정확한 루트를 알아볼까 한다.

  일단 충주 부근에 집결한 고구려군은 1차 주둔지인 문경까지 현재의 중부내륙고속도로 방향으로 진군 하였다. 특히 충주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줄기를 이동해야한다.

이곳에 문경새개가 있는데 산과 산사아의  낮은고개로 나중에 신라가 장수왕의 남진을 막은 국경선이 되는 곳이고 신라가 고모산성이랑 거점성을 쌓은 곳이며다.

이렇듯 문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하는 고개이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 주요 교통 거점으로 이용되어 왔다.
즉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기위해서 유일한 길목이었던 것이다. 현재 이 길목을 따라 중부내륙고속도로도 나있다. 이렇게 50km 내외를 진군한 고구려군은 문경에 도착하고 너른 들판과 영강이 흘러 식수가 제공되는 이 곳에서 1차 주둔지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군 남진로 1구간

  이후 재정비한 고구려군은 문경을 시작으로 상주를 거쳐 남하하게된다.

영강의 지류는 상주 부근에서 우리나라 4대강 중 하나인 낙동강과 만나게 되고 고구려군은 낙동강을 따라 2차 주둔지인 구미로 나아 갔을 것이다.
낙동강의 이점은 원할한 식수의 공급과 낙동강을 따라 대구 달구벌까지 100km나 되는 거리를 행군해야 하기에 보급품을 배에 실어 나아가는 이점이 있다.

이렇게 되면 육로로 보급품을 수송하지 않아도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절감과 더 빠른 행군이 가능하다.
또한 낙동강을 따라 축조된 거점성(상주의 자산산성 등 아래 도면)들은 고구려인 지원군을 엄호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약 50km를 남하한  고구려군대는 구미에서 2차 주둔지를 마련하고 정비를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군 남진로 2구간

왼 상주 자산산성 경계 방향(동쪽으로 낙동강 방향견시가능), 상주 자산산성 현황

  구미에서 한숨 돌린 고구려 원정대는 다시 한번 낙동강을 나란히 하고 달구벌로 나아간다. 달구벌(대구)는 분지형의 도시로 10km가 넘은 너른 충적대지 지형이다. 또한 금호강이 대구의 북쪽을 관통하여 식수의 공급도 원할하다. 이런 달구벌은 통일신라 689년 신문왕이  주변을 감싸는 산맥의 방어적인 활용성, 서북으로 진출하기 용이한 지리적 이점, 낙동강과 금호강과 넓은 대지는 농사 짓기에 충분한 비옥한 땅 이라는 이유로 천도를 감행 하려고 했던 곳이다.

  이런 달구벌이 경주로 가기전 마지막 주둔지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여기에서 대대적으로 보급품의 충당과 무기 및 식량 정검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정비한 고구려군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진군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군 남진로 3구간

  서라벌로 진입하는 고구려군은 영천과 건천을 지나 신라 왕경인 월성으로 진입하고 여기서 왜 및 가야 세력과 1차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고구려군이 신라성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이를 증명한다. 고구려의 개마무사 즉 중장기병을 접한 왜군과 가야군 그리고 같은 동맹국 신라군까지 가히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북쪽의 고구려 기병과 보병들로 인해 왜군과 가야군은 남쪽으로 퇴각하고 고구려군은 월성을 중심으로 4차 주둔지를 편성하고 휴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 내물왕의 간곡한? 요청으로 김해의 금관가야로 진군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신라의 충격은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광개토대왕을 찬양하는 글귀이다.’

  실제 신라의 왕성 월성의 남쪽에는 너른 충적대지가 발달하고 있다. 5만 대군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재정비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린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 장수왕 3년 415넨 제작

  마지막 여정이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임나가라가 당시 김해를 중심으로 한 연맹국가 금관가야 일 것이라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판단한다(개인적인 피셜임). 마지막 루트는 현 중부고속도로 언양-양산으로 이어지는 길게 쭉 뻗은 길은 거칠것이 없는 지역이다. 약 55km를 행군한 고구려군은 낙동강을 마주하게 되고 현재의 양산 물금이란 너른 충적대지에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물금은 삼국시대부터 철광석의 생산지로 1995년까지 철광석을을 채광하던 광산이 있어던 곳이다. 이런 철광석 산지라는 이점으로 예로부터 신라와 가야 세력간의 다툼이 치열했던 곳이었다 한다

   4~7세기 한반도 최대규모의 체절산업단지인 이곳 물금에서 고구려군은 신라의 장인들로 하여금 무기를 정비하고 고치고 화살촉등을 보급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비문에도 낙동강에 응거하던 왜인들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김해에 진입할 수 있는 물금이야 말로 고구려군의 진격 방향이었을 것이다.

고구려군 남진로 5구간 지점 필자가 작성

왼 양산 물금유적에서 출토된 송풍관, 오 1960년대 물금 제철광산 전경

  이렇게 낙동강을 도하하고 금관가야의 봉황대로 진입하는 고구려군 김해를 쑥대 밭으로 만든 개마무사들의 활약으로 전기의 금관가야가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정은 한반도 남부지역의 판도를 바꿔 놓은 계기가 되었고 신라는 고구려의 버프를 발판삼아 이후 삼국의 주도권을 가져 삼국통일 이라는 대업을 이루게 된거라 판단된다.

고구려군의 금관가야 진군로

  아무리 철의 왕국 금관가야 라지만 북쪽의 대륙에서 넘어온 개마무사를 직접 경험하고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광대토대왕의 신라구원은 어찌보면 호태왕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과 동시에 확실히 장수왕에게 남진정책을 실현하게 끔 발판을 마련해준 계획 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고구려군의 무쌍을 경험한 왜, 가야, 신라? 인들은 다음 왕인 장수왕이 간다 간다 내려간다. 하면 일단 한번 추춤하고 긴장한 것을 사실 이었을테니까요.

출처

1. 백영정, 2007, 5~6세기 신라산성 연구.

2. 조영광, 2014, 고구려 광개토, 장수왕 시기 한_예족의 복속과 고구려인화.

3. 신광철, 2015. 고구려의 강원도 진출과 의의.

4. 박종서, 2014, 고구려 고국원왕-광개토태왕대 남진로 검토.

​5. 위성사진 네이버지도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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