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로 들어오는 남북로 2갈래?

고구려사를

지형을 바탕으로 연구하다 알아내고 의문인 점들을 개인적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아직 고구려의 중심지가 환도성인 340년경 고구려에 들어오는 길은 두갈래로 남로와 북로가 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42년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 ※으로 천도하였다. 건위장군(建威將軍) ※ [모용]한(翰)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후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 ※는 평탄하고 넓은데 남도(南道) ※는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도로 가려고 하였다.


정리하면 북로는 크고 자주 다니는 길이고, 남로는 좁고 험해 자주 다니는 길은 아니라 합니다.

고구려


미천왕때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을 장악하는데 그당시 현도군은 제 3 현도군치로 추정되는 요녕성 무순시고, 요동은 아쉽게도 모용외에게 패해 장악에 실패하죠.


고국원왕 5년(335년) 신성을 쌓는데 이곳은 오늘날 무순시 조금 북쪽에 위치한 고이산성으로 확실시 됩니다.
그리고 신성은 앞으로도 문헌에 자주 나올만큼 고구려의 최대 요충지중 하나가 되죠.

구 현도군 이제는 신성이 있는 혼하를 따라 들어가면 소자하가 나오는데 들어가다보면 제 2 현도군치가 있던 영릉, 신빈 지역이 나옵니다.

또 이 지역에는 후에 신성에 버금갈만큼 자주 나오는 남소성, 목저성이 위치한 곳으로 비정되는데

新唐書』卷220에는 647년 당의 이적(李勣)이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때, ‘영주도독병(營州都督兵)을 이끌고 신성도(新城道)로 진입하여, 차례대로 남소(南蘇), 목저(木底)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라는 것을 보아 신성 우측 소자하 유역의 성들중 하나가 남소성과 목저성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남소성의 위치는 철배산성, 오룡산성으로 추정되며 목저성은 남소성보다 동쪽에 있던것을 감안해 그 오른쪽에 있는 성들중 하나로 비정됩니다.


확실한건 신성이 무순 고이산성으로 비정되는 이상 소자하 주변이 남소와 목저성이 있던곳이라 볼수 있죠.

구당서 설인귀전에 나오는 내용은 신성을 함락후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죠.


정리하자면 소자하 유역은 신성을 지나 남소성, 목저성 등이 있으며 고구려 중심지로 들어가는 핵심 길입니다.


그다음으로 태자하 유역이 있는데 위에 소자하 유역에 비하면 길이 좁고 험합니다. 또 이후에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성이나 지역이 없습니다. 즉 위에 소자하 유역에 비하면 작은곳이죠.

그러나 태자하는 한나라때 대양수(大梁水)라 불리었는데 이 대양수 상류에 살고 있던 맥족 있었습니다. 대양수에 살고 있는 이 맥족을 양맥(梁貊)족이라 추정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3년(서기 14)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 ※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 ※ 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 ※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이처럼 양맥족은 고구려 서쪽에 있었는데 태자하 유역에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 중심지는 오늘날 태자하 유역의 태자성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태자성은 고구려 초기 시기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이 양맥족이 고구려 역사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시기가 있는데… 바로 동천왕때 관구검의 침입 입니다.


삼국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20년(246) 가을 8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 ※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 ※로부터 침범하여 왔다. ※ 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서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梁貊之谷)※에서 싸워서 또 이기고,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군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대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 그리고는 철기(鐵騎) ※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형의 진[方陣] ※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니, 우리 군대는 크게 궤멸되고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으며, 왕은 기병 1천여 기(騎)를 데리고 압록원(鴨淥原) ※으로 달아났다.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사람들을 죽이고 장군 왕기(王頎) ※를 보내 왕을 쫓았다.


정시 중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킴)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梁의 음은 渴)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 수천명을 참획했다. –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이 양맥지곡(梁貊之谷)과 양구(梁口)라는곳이 등장하여 양맥의 위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 양맥의 위치는 2가지 설로 위에 언급한 태자하 상류 지역이라는 설과 부이강 하류 지역의 서개마현 이라는 설입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양맥은 해당 위치입니다.


양맥이 서개마현 부이강 하류라는 위치를 토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관구검은 소자하 유역을 따라 진격해온것이 됩니다.


양맥이 태자하 상류 지역이라는 설을 바탕으로 지도를 나타내봤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관구검과 동천왕이 총 3번의 회전을 벌인것으로 나옵니다. 첫번째가 비류수 싸움 두번째는 양맥의 골짜기(양맥지곡)에서의 싸움 그리고 마지막은 장소가 언급되지 않는곳입니다. 어느쪽 설을 따르든 관구검은 비류수 전투에서 패해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세번째 싸움의 장소로 추정할만곳이 있는데 그건 바로 관구검전에 언급되는 바로 양구라는 곳입니다.

보통 양구와 양맥지곡을 동일한 장소로 여기는데 저는 삼국사기에서 동천왕이 양맥의 골짜기에서 싸움 후 퇴각하는 관구검군을 5천의 철기병을 이끌고 추격한것을 보아 같은 장소가 아니라 3번째 회전의 장소는 양맥의 입구 말그대로 요동과 현도에서 양맥으로 들어오는 입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비류수에서 3천을 잃고 패한 관구검은 후퇴해서 양맥의 골짜기로 오게 되는데 이곳은 양맥지역에서 비류수 지역으로 들어오는 길목 즉 육도하가 있는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양맥지곡에서도 패한 관구검은 아예 퇴각을 하게 되지만 동천왕은 이에 5천의 철기를 이끌고 추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관구검은 후퇴하다 양구라는 곳에서 방진을 편채 3번째 회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양구는 문자 그대로 (요동에서 갈때) 양맥의 입구라는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동천왕은 2만중에 1만 8천이 죽는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 양맥의 위치가 부이강 하류지역이라면 관구검은 현도에서 출발해 소자하를 따라 들어온게 됩니다. 이 루트는 위에 언급했듯이 전연, 후연, 당나라 등 주 침입루트입니다.


그러나 양맥이 태자하 상류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는데 비류수 까지는 위의 길 소자하 루트를 따라 들어와도 되지만

퇴각은 태자하 방면 양맥지곡으로 했단 말이죠. 상식적으로 후퇴를 하면 왔던길로 하지 다른길로 가는것은 상식밖이죠.

그러니 관구검은 태자하 유역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것인데 굳이 관구검의 침입로를 한번 다룬것은 이제 전연 모용황의 침공로를 다룰때 100년전의 침공은 어떠했나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양맥의 위치에 관해서는 2020년인 오늘도 학계에서 태자하 상류를 지지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태자하 상류가 양맥이라는 점에 지지합니다.


이제 전연 모용황의 침공에 대해 사료들입니다.


12년(342)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은] 환도성으로 옮겨서 거처하였다.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 ※으로 천도하였다.
건위장군(建威將軍) ※ [모용]한(翰)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후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 ※는 평탄하고 넓은데 남도(南道) ※는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도로 가려고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적은 상식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겨서, 당연히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은 소홀히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도로 가 그들을 쳐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따로 적은 군사를 북도로 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체가 이미 무너지면 사지(四肢)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서,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㝢)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 [연나라] 장군 ※ 모여니(慕輿埿)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인해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는 돌아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경졸(勁卒,굳센 병졸.강병) 4만을 이끌고 남섬(南陝)으로부터 들어가며 우문(宇文)과 고구려(高句麗)를 치고 또한 (모용)한(慕容翰)과 (모용황의) 아들인 (모용)수(慕容垂)를 전봉(前鋒,선봉)으로 삼고 장사(長史) 왕우(王㝢) 등을 보내 1만 5천 무리를 이끌게 하니 북치(北置)로부터 진격하였다.

고구려왕 쇠(釗)(→16대 고국원왕)는 (모용)황의 군대가 북쪽길로 올 것이라 여기니 이에 그의 동생 무(武)를 보내 정예(精銳) 5만을 통수하게 하여 북치(北置)에서 항거하고, 자신은 약졸(弱卒)들을 이끌고 남섬(南陝)(남협南陜? 아래 ※② 참고)을 방어했다. (모용)한이 쇠(釗)와 더불어 목저(木底)에서 싸워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마침내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丸都)로 들어가니 쇠(釗)는 단기필마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쇠(釗)의 부친인 리(利)(→을불리乙弗利. 15대 미천왕)의 묘(墓)를 파헤쳐 그 시신과 (사로잡은) 그의 모친과 처, 진보(珍寶,보물)들을 수레에 싣고 남녀 5만여 구(口)를 약득하고 그의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환도(丸都)를 허문 뒤에 돌아왔다.  – 진서 재기 모용황전-


장차 고구려를 공격하려 하는데, 고구려(로 진군하는데)에는 두가지의 길이 있어 그 중 북쪽 길은 평평하고 넓으며 남쪽길은 험하고 비좁으니 [북쪽 길은 북치(北置)로부터 진격하고 남쪽길은 남협(南陜,or 남합)(※②)으로부터 목저성으로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북쪽길을 통해 진격하고자 하였다. (모용)한(慕容翰)이 말했다,

“로(虜)(→고구려)가 상정(常情,일반적인 생각)으로 헤아려 필시 대군(大軍)이 북쪽 길로 오리라 여길 터이므로 응당 북쪽을 중시하고 남쪽을 경시할 것입니다.
왕(王)께서 정예병을 통수해 남쪽 길로부터 공격하여 출기불의(出其不意)한다면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쉽게 함락될 것이라는 뜻) [고구려왕이 환도(丸都)에 거처하였다.

帥(수)는 率(수 또는 솔)로 읽히며 아래에서도 같다.] 따로 편사(偏師,주력군이 아닌 소부대)를 보내 북쪽 길로 보내어 설령 (그 편사에게) 차질(蹉跌)이 생긴다 하더라도 [蹉의 음은 倉+何. 跌의 음은 徒+結. 蹉跌(차질)은 실족하여 넘어지는 것이다.] (환도가 함락되어) 그 복심(腹心)이 이미 무너졌다면 사지(四支)는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11월, (모용)황이 몸소 경병(勁兵,강병,정예병) 4만을 거느리고(將) 남쪽 길로 나오며 [將의 음은 卽+亮. 아래에서도 같다.] 모용한(慕容翰), 모용패(·慕容霸)를 전봉(前鋒,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 왕우(王寓) 등을 보내 병(兵)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길로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쇠(釗)는 과연 동생 무(武)를 보내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린 채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리병(羸兵,약졸)을 통수하며 남쪽 길을 방비했다.

[羸의 음은 倫+爲.] 모용한(慕容翰) 등이 먼저 도착하여 쇠(釗)와 합전하고 (모용)황이 대중(大衆,대군)을 이끌고 뒤이었다. 좌상시 선우량(鮮于亮)이 말했다,

“신은 포로가 된 몸으로 왕에게 국사(國士)로 대우받는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이 바로 신이 죽는 날입니다.”

단독으로 몇 기(騎)와 더불어 선두로 나가 고구려의 진(陳)을 범하여 향하는 곳마다 적을 꺾고 무너뜨리니 고구려의 진(陳)이 동요하였다. [騎의 음은 奇+寄이며 아래에서도 같다. 陳(진)은 陣(진)으로 읽힌다.]
그러자 (모용황의) 대중(大衆,대군)이 이를 틈타 고구려병을 대파했다. 좌장사 한수(韓壽)가 고구려의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베었고 [고구려가 설치한 관직에는 상가(相加), 대가(大加), 소가(小加)가 있었다.]

제군들은 승세를 타고 (고구려병을) 추격하여 마침내 환도(丸都)로 들어갔다. 쇠(釗)가 단기필마로 달아나니 경거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이를 뒤쫓아 그(→고국원왕 쇠釗)의 모친 주씨(周氏)와 처를 붙잡아 돌아왔다.

때마침 왕우(王寓)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 모두 패몰하니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이 다시(復) 끝까지 추격하지는 않고 [復의 음은 扶+又. 아래에서도 같다.] 사자를 보내 쇠(釗)를 불렀으나 쇠(釗)가 나오지 않았다.


장차 돌아가려 하니 한수(韓壽)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수비병을 두고 지킬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임금이 패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우리의) 대군(大軍)이 떠난 뒤에는 분명 다시 모여들어(鳩聚) [鳩(구) 역시 聚(취)다.] 그 나머지 신(燼,깜부기불, 유민을 의미)을 거두어 [불타고 남은 나머지를 燼(신)이라 하는데 여전히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청컨대 그의 부친 시신을 (파내어) 수레에 싣고 그의 살아있는 모친을 가둔 채 돌아가십시오.
그가 몸을 묶고 스스로 귀부해오는 때를 기다려 그 뒤에 (시신과 모친을) 되돌려주며 은혜와 신의로 안무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이를 따랐다. 쇠(釗)의 부친 을불리(乙弗利)(→15대 미천왕)의 묘를 파서 그 시신을 싣고 그의 부고(府庫)에 있던 누세(累世)의 보물(여러 대를 거쳐 내려온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구(口)를 포로로 잡고 그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丸都城)을 헐어버린 뒤에 돌아갔다.


자치통감


주목해야 할것은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이 남로와 북로로 2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로와 북로에 대한 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것만 적어보겠습니다.
어느 설이던가 소자하 유역이 배제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핵심은 소자하가 남로냐 북로냐고 보시면 됩니다.

북로와 남로를 추정할만한 근거는 많지 않습니다. 북로는 평평하고 넓고 주로 쓰는 길이라는것 뿐입니다.
다만 남로는 조금 사정이 나은데 험하고 비좁고 자주 안쓰는 길이며 남협으로부터 목저(木底)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진서에도 남로로 가서 목저에서 싸워 고구려군을 이겼다고 나옵니다.

우선 북로가 소자하 유역 이고 남로가 태자하 유역이라는 설입니다.

전연은 3년전 339년에 신성까지 공격했다가 고국원왕이 화해를 요청하자 물러섰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 342년의 침공 당시에는 신성은 고구려 영역입니다. 그리고 지도로만 봐도 소자하 유역은 태자하에 비해 넓고 평평하며 주로 쓰는길이 맞습니다.


전연과 후연이 이지역을 소자하 유역을 집중 공격하는데


고국원왕 15년(345)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쳐들어와서 남소(南蘇) ※를 함락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두고 돌아갔다.


광개토대왕 9년(399) 봄 정월에 왕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연나라 왕 [모용]성(盛) ※이 우리 나라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했는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
모용희(慕容熙) ※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南蘇城)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처음에 모용황이 당연히 북로로 침공하려고 했던것처럼 이후에도 전연과 후연은 이곳을 줄기차게 공격하게 공격하게 됩니다.


이제 남로 태자하 쪽을 살펴보면 당연히 윗길에 비하면 좁고 잘 안쓰이며 오늘날에도 환도성쪽인 집안으로 가는 큰길이 없습니다. 또 문헌상으로도 이곳으로 공격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태자하 상류가 양맥이라는 설이 맞다면 태자하 유역으로 침공해온건 관구검과 모용황이 됩니다.


그러나 이설은 허점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목저라는 지역 때문입니다.


남소성과 목저성은 소자하 유역이라 즉 북로상에 있는데 남로 태자하 유역으로 갔으니 목저에서 싸울 수가 없죠.

그럼 목저는 태자하 유역에 있는게 아니냐고 할텐데 아쉽게도 이지역의 성중 하나를 목저성으로 비정하지 않습니다.


이 목저라는 곳이 그럼 여기에 왜있느냐  하면 이제 끼워맞춰야 합니다.

첫번째는 목저성이 태자하 유역에 있는것중 하나라는 겁니다. 아직까지 남소성과 목저성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만큼 목저성은 소자하 유역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물론 연구결과로는 정확하게 일치되지 않는것일 뿐이지 소자하 유역이라는것은 이견이 없을정도로 신빙성은 떨어집니다.

둘째 이곳에 또다른 목저라는 곳이 있다는 겁니다. 이름이 같지만 다른 지역이 고구려사에 여러번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신성과 평양성이 있겠네요.


서천왕 7년(276) 여름 4월에 왕은 신성(新城) ※
혹은 신성은 나라 동북 ※쪽의 큰 진[大鎭] ※이라고도 하였다.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은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9월에 신비로운 새[神雀]가 궁정에 모여들었다.


봉상왕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廆) ※가 침입하여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 재(新城宰) ※인 북부 ※
소형(小兄) ※
고노자(高奴子) ※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갔다.


고국원왕이 쌓는 신성은 현도군 자리가 있던곳이라 미천왕 이전에 나오는 신성은 동북 지역에 있던 신성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동북 신성을 무순의 신성으로 착각하곤 하죠.


동천왕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 ※와 사직 ※을 [그곳으로] 옮겼다.


환도성이 불타 집잃은 동천왕은 평양성을 새로 쌓죠 이 역시 낙랑군 장악 이전이라 후에 장수왕이 천도하는 그 평양성이 아니죠.


목저라는 지명이 2군데라는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번째 목책을 쌓은 시설 이라는 겁니다. 목저라는 말을 짜맞춘것으로 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다음은 남로 소자하 설로 남로 소자하에 남소성과 목저성이 있다는걸 전제로 한 설입니다.


이 주장에 문제점은 바로 북로가 다소 이상하다는 겁니다. 어딜 봐서 북로가 넓고 자주 쓰이는 길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소자하 유역 남소성과 목저성 을 통과하는 길을 남로로 비정해버린거라 북로의 넓고 자주 쓰이는 길이라 할곳이 없습니다.
또 요동에서 이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당시 전연의 수도에서 오기에는 너무 돌아가는 길입니다.


변론을 하자면 나통산성을 통과하는 북로도 분명 북으로 올라가는 길인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집안 지역으로 들어가는 큰길이 있습니다.

또 소자하 유역의 목저를 지나간게 되어 기록과 부합 됩니다.

즉슨 이렇게 설정하면 문헌과 차이나는곳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소자하 유역은 제 2 현도군치가 있던곳이고 지나가려면 신성, 남소성, 목저성 등을 모조리 거쳐야 하는데

정말 이곳을 “좁고 험하며 잘 안다니는 남쪽 길”로 비정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시기의 신성도(新城道)와 수나라의 남소도(南蘇道)는 바로 소자하 유역을 가리킨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과연 전연의 침공시기 고구려 남북로중 남로에 해당 하는 것이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즉 소자하 유역은 모용황이 침공하던 시기에는 북로 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관구검과 모용황은 그당시 고구려 태자하 유역 남로로 공격해왔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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