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과 병자호란

임경업

임경업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여러 가지가 남아 있지만, 이는 대부분 후대에 임경업의 신화화가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사실관계가 변주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인조 9년(1631) 태어나 숙종 18년(1692) 사망한 이선(李選)의 문집인 『지호집』의 임장군전은 여러모로 이후의 자료들과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지호집』 임장군전은 그 작성 시점이 무진년(1688) 9월로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51년이 지난 뒤에 해당하지만, 송시열이 작성한 『송자대전』의 임장군경업전을 제외한다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입니다.

병자호란과 임경업

관련 전기류 자료의 작성 시기 비교

ⓐ 『송자대전』 임장군경업전(林將軍慶業傳), 1671년 경 ​(삼학사전 작성 시기로 유추)

ⓑ 『지호집』 임장군전(林將軍傳), 1688년 9월

ⓒ 『하당집』 임장군경업전(林將軍慶業傳), 1697년 이전 ​(임경업 복권 전으로 추정)

ⓓ 『밀암집』 임장군경업전(林將軍慶業傳), 1697~1706년 ​(임경업 복권 후, 추증 전)

ⓔ 『임충민공실기』 시장(諡狀), 1706년

ⓕ 『서암집』 충민임공행장(忠愍林公行狀), 1706년 이후 (임경업 추증 후)

​ⓖ 『숭악집』 임장군전(林將軍傳), 1706~1723년 (임경업 추증 후, 저자 사망 전)

ⓗ 『입재유고』 임경업전(林慶業傳), 1756년 이전 (저자 사망 전)

ⓘ 『강한집』 명배신전(明陪臣傳), 1747~1750년 (송사행묘지명 참고)

ⓙ 『임충민공실기』 ​신도비명(神道碑銘), 1765~1766년 (저자 대제학 역임 시기)

ⓚ 『강한집』 충민임공신도비명(忠愍林公神道碑銘), 1766년 경 (저자 대제학 역임 추정)

ⓛ 『홍재전서』 달천충렬사비(達川忠烈祠碑), 1788년

ⓜ 『임충민공실기』 연보(年譜), 1791년

ⓝ 『연경재전집』 임충민전(林忠愍傳), 1800~1839년 (정조 사망 후, 저자 사망 전)

단순히 시기적으로 1차 사료에 가까운 것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지호집』 임장군전은 다른 자료들을 상회하는 신뢰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시기에 국한하여 『지호집』의 임장군전에 보이는 내용을 다른 자료들과 교차검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1. 『지호집』​ 임장군전

병자년 정월, 이에 장군이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장군은 또 비국에 말하길 “오랑캐의 남목(南牧)할 기미가 이미 드러났으니, 바라건대 2만 병력을 얻어 막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비국이 처음에 따르지 않다가, 장군이 이를 쟁론하자 억지로 이에 해서(海西)의 2천 병력을 허급(許給)하였다.

A-2. 『승정원일기』 1636년 3월 4일

원수(김자점)가 아뢰길 “황해의 군병 5000명을 뽑아서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정식으로 부방하는 남군(南軍) 2400명을 백마산성에 보태어 방어하게 하고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임경업으로 하여금 실패 없이 굳게 지켜 보전하도록 한다면 국사에 있어서도 다행일 것입니다”하자, 상께서 가라사대 “경이 잘 헤아려서 하라”하시었다.

B-1. 『지호집』 임장군전

이때 조정에서 척화가 득세하여 신사(信使)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장군에게 심중(瀋中)으로 상관(象官)을 보내어 사신단이 장차 다다를 것임을 고하게 하니, 대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상관에게 경계하길 “사신단이 늦어졌으니 적병이 분명히 움직일 것이다. 만약 백마(白馬)의 일을 협박하여 묻는다면 너는 모름지기 대답하길 ‘여덟 장수가 각기 3영의 군사를 인솔하고 들어갔으며, 무기는 예리하고 군량은 풍족하여 수년을 버틸 수 있다. 성 안에 다시 한 커다란 못이 있어 어룡(魚龍)이 둥지 삼는 곳이라 한다’고 하라”고 하였다. 상관이 과연 통원보에서 오랑캐와 만났는데, 백마의 허실을 물으니 장군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다.

B-2. 『만문노당』 1636년 12월 5~7일

5일에 란산관에 묵었다. 6일에 통원보를 지나고 경계를 나가서 묵었다. 7일에 진동보에 묵었다. 같은 7일에 솔호(solho) 나라의 사신으로 통사 1명이 사람 2명 데리고 앞서 소식을 알리러 와서 “우리 큰 관리를 데리고 큰 장사치가 장사 교역하며 온다”하며 알리러 온 것을 만나고 잡았다.

C-1. 『지호집』 임장군전

12월에 봉황(鳳凰)ㆍ송골(松鶻) 봉수가 적병을 보고 2거(炬)를 올려 경보를 보고하니 이에 치계하여 아뢰었다. 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즉각 변란을 보고하지 않아서 대가가 창황하여 겨우 남한(南漢)에 들어갔다.

C-2. 『병자록』 기초두위절 (나만갑)

12월 6일 이후에 잇달아 두 봉화를 들었는데[連擧二烽], 김자점은 말하기를 “이것은 박로가 들어가서 오랑캐가 반드시 나와 환영하는 것이다. 어찌 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하고는 즉시 치계하지 않았다.

D-1. 『지호집』 임장군전

오랑캐 백여 기가 심중(瀋中)으로 돌아가 보고하니 장군이 병사를 거느리고 성을 내려와 압록강에서 추격하여 그 장수를 죽이고 사로잡힌 남녀 120여 인과 말 60여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D-2. 『만문노당』 1637년 1월 16일

16일에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 우바이 등에게 선봉 군대를 거느리고 “‘온전히 나라를 지켜라’하며 남긴 왕, 버이러에 힘 되게 하자”고 하여 보냈다.

E-1. 『지호집』 임장군전

서윤 홍익한(洪翼漢)이 압송되어 심(瀋)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는데 차원(差員) 변대중(邊大中)이 결박한 것이 몹시 심했다. 장군이 나와 보고는 그 결박을 풀고, 손을 잡고 위로하길 “명공(明公)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천하에 칭송이 있고 죽어서는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여비를 넉넉히 부조하니 홍익한이 감탄하였다.

E-2. 『북행록』 1637년 2월 16일 (홍익한)

여명에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수문장에게 전령하여 족쇄를 풀더니 나를 이끌어 들어와 앉히고 말하길 “국사(國事)가 이에 이르렀으니 무릇 어떤 말을 거듭하겠습니까. 명공(明公)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대의(大義)를 부지할 수 있고 죽어서는 죽백에 빛날 수 있으니 비록 죽으나 어찌 한탄할 바가 있겠습니까”하였다. 나는 답하길 “내 한 상소로 말미암아 국사를 크게 그르쳤으니, 무슨 겨를에 그 나머지를 논하겠소. 죽기는 진실로 애석하지 않으니 바라건대 급히 가서 임금의 명이 지체되게 하지 않겠소”라 하였다. 부윤이 내 여비를 묻고 일체 마련하여 주선하지 않음이 없었다.

​물론 『지호집』 임장군전의 서술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지호집』에서는 임경업이 비변사에 무려 2만의 병력을 구했다고 하지만, 『임충민공실기』에 실린 유림(柳琳)에게 보낸 편지와 『인조실록』에 전재된 상소문을 보면 병자호란 직전까지 임경업이 소원한 것은 일관되게 5천 규모의 병력이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서 병자호란이 끝난 이듬해 올린 상소를 봐도 임경업이 소원한 병력은 6~7천 규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2만이라는 숫자는 본래 5천이던 것이 혼동 또는 과장된 결과로 추정됩니다.

『지호집』에서 병자호란 초기 급보가 신속하게 한양에 이르지 못한 책임을 김자점에게 전가하는 서술도 사실 정확한 기록은 아닙니다. 과거 게시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임경업이 12월 6일에 최초로 전파한 봉화는 2거로 현상(現狀)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송골산에서 감지되는 청군은 300명 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니 5거 폐야(蔽野)에는 미달하는 규모이며, 아직 국경을 넘은 것도 아니었으니 3거 범경(犯境)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국경 너머에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보고만으로 전시상황을 선포해야 할까요? 김자점의 입장에서는 후속보고를 기다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미 역적으로 낙인찍힌 김자점이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청군이 병자호란 중 본국으로​ 먼저 돌려보낸 기병이 100여 명이었다는 기술도 실제보다는 다소 축소된 규모입니다. 『만문노당』을 보면 병자호란에서 청군이 선봉 군대로 편제한 것은 300명이었고, 이들은 뚜렷한 피해 없이 남한산성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압록강에 도달했을 때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다만 하나의 여지가 있는데, 이들이 남한산성 포위망을 떠나 압록강에 이르는 사이에 손실이 발생했을 가능성입니다. 실제 『서당사재』의 김여기(金礪器) 묘갈명에는 병자호란 중 먼저 돌아가던 청군을 차련관에서 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결과 처음 출발한 300명 가운데 일부가 손실 또는 분산되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서당사재』 증호조판서김공묘갈명

오랑캐가 연해의 진보를 두려워하여 그 돌아갈 길이 끊기자, 그 장수 요퇴(要退)로 하여금 정예를 거느리고 차련(車輦)으로 회군하였다. 공은 좌우영장(左右領將) 정시창(鄭始昌), 김정망(金廷望)과 천총 황의남(黃義男)과 함께 병사 백여 인을 거느리고 복병을 두어 요격하여 사로잡힌 남녀 22인을 빼앗았다. 두 종을 보내 사잇길로 승첩을 아뢰니, 상께서 명하여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두 종의 천역을 면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이후 손에서 손으로 옮겨질 때마다 조금씩 크게 변주됩니다. 『송자대전』, 『하당집』, 『밀암집』에는 병자호란 중 임경업의 행적에 대해 ‘백마산성을 지켰다’는 정도로 짧게 언급하기 때문에 『지호집』과 직접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것은 1706년 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시장과 행장이 되겠습니다. 위에서 A~E로 정리한 지점의 변주 과정은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습니다.

A

ⓑ ​2만 군사의 증원을 비변사에 요청하나 거부됨, 결국 황해도의 2천 군사를 증원받음

ⓔ 2만 군사의 증원을 요청해 얻었으나 간관에게 저지됨, 성 안은 노약남녀 고작 8백 명

ⓕ 2만 군사의 증원을 요청해 얻었으나 간관에게 저지됨, 성 안은 노약남녀 고작 8백 명

ⓖ 2만 군사의 증원을 요청해 얻었으나 간관에게 저지됨, 성 안 병력은 노약자 1천 미만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2만 군사의 증원을 요청해 얻었으나 간관에게 저지됨, 성 안은 노약남녀 고작 8백여 명

ⓚ 2만 군사의 증원을 요청해 얻었으나 간관에게 저지됨

ⓛ 언급 소실

ⓜ 2만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나 거부됨, 둔전병은 노약남녀 고작 8백여 명

B

ⓑ 역관을 보내 사신단이 지체됨을 알리고 백마산성의 방비를 과장

ⓔ 역관을 보내 사신단이 지체됨을 알리고 백마산성의 방비를 과장하나 적이 믿지 않고 정탐

ⓕ 역관을 보내 사신단이 지체됨을 알리고 백마산성의 방비를 과장하나 적이 믿지 않고 정탐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역관을 보내 사신단이 갈 것임을 알리고 백마산성의 방비를 과장

C

ⓑ 송골산ㆍ봉황산에 봉화를 두어 병자호란 전야 2거를 최초 전파

ⓔ 송골산ㆍ봉황산에 봉화를 두어 병자호란 전야 2거를 최초 전파

ⓕ 송골산ㆍ봉황산에 봉화를 두어 병자호란 전야 2거를 최초 전파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송골산ㆍ봉황산에 봉화를 두어 병자호란 전야 최초 전파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송골산ㆍ봉황산에 봉화를 두어 병자호란 전야 2거를 최초 전파

D

ⓑ 회군하던 적 100여 기를 압록강에서 추격, 적장을 죽이고 포로를 탈환

ⓔ 회군하던 적 정예기병을 압록강까지 추격, 적장과 적 태반을 죽이고 포로를 탈환

ⓕ 회군하던 적 300기를 압록강까지 추격, 적장 요호와 적 태반을 죽이고 포로를 탈환

ⓖ 회군하던 적 300기를 적장과 적 태반을 죽이고 포로를 탈환

ⓗ 언급 소실

ⓘ 언급 소실

ⓙ 회군하던 적 정예기병을 압록강까지 추격, 적장 요퇴를 죽이고 포로를 탈환

ⓚ 의주에 남은 적 300기를 적장 요호를 죽이고 포로를 탈환

ⓛ 회군하던 적 300기를 추격, 적장과 적 태반을 죽이고

ⓜ 회군하던 적 300기를 압록강까지 추격, 적장 요퇴와 적 태반을 죽이고 포로를 탈환

E

ⓑ ​”명공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천하에 칭송이 있고 죽어서는 죽백에 이름을 남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

ⓔ “사대부의 죽음은 그럴 바를 얻기 어렵다는데 공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천하에 칭송이 있고 죽어서는 죽백에 이름을 남기니, 공이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

ⓕ “사대부의 죽음은 그럴 바를 얻기 어렵다는데 공의 이 길은 태산북두와 높이를 다툴 것입니다. 공이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

ⓖ “대장부의 죽음은 그럴 바를 얻기 어렵다는데”

ⓗ “사대부는 그 죽음을 얻기 어렵다는데 공의 이름이 장차 태산북두와 그 높이를 다툴 것입니다.”

ⓘ 언급 소실

ⓙ “공의 이 길은 죽음이 그럴 바를 얻었다 이를 수 있습니다.”

ⓚ “군자의 죽음은 그럴 바를 얻기 진실로 어렵다는데 공은 천자를 위해 대의를 밝혔으니, 죽어도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

ⓛ 언급 소실

ⓜ “명공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천하에 칭송이 있고 죽어서는 죽백에 이름을 남기니, 공이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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