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김씨세력이 들어오게된 경로 10분만에 알아보기

이번에는 신라(新羅)의 김(金)씨들이

어떻게 계림(사로국)으로 들어 왔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김(金)씨들은 전기(前期)와 후기(後期)의 2번에 걸쳐 이동한 흔적이 보이는 데, 그 첫번째 전기의 이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료에는 최초로 사로국(斯盧國)에 들어온 김씨를 김알지(金閼智)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알지가 어떻게 들어 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雞鳴於其下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卷第一 신라본기新羅本紀》

김알지(金閼智)에 의해 붙여진 계림(鷄林)의 명칭은 닭(鷄:새토템)과 수목(林:신단수,세계수)이 결합된 뜻이로 이는 흉노, 선비 등의 북방 유목 민족의 상징입니다.

신라

닭과 수목이라는 연관성을 볼때 김알지(金閼智)는 흉노나 선비등의 북방 유목 민족임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알지가 어떻게 들어왔는 지는 사료를 통해서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3세기 경에 김씨 인들이 어떻게 들어 왔다는 내용은 북사(北史), 수서(隋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或稱魏將毋 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 》

或稱斯羅. 魏將毌 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爲新羅焉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는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 [그들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 갔는데, [이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

북사(北史), 수서(隋書)에는 공통적으로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그때 옥저까지 쫒겨난 자들이 신라를 세웠다는 기록이며 당시 고구려왕은 동천왕(東川王)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동천왕(東川王)의 이동 경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천왕은 관구검에 의해 쫒기면서 압록강 쪽으로 올라가 압록원에 이르게 되고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에 다다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王以一千餘騎, 奔鴨渌原…王奔南沃沮, 至于竹嶺

(동천)왕이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髙句麗本紀), 동천왕(東川王) 246년 조》

또한 옥저를 지나 숙신의 경계까지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南界.

(동천왕이)옥저를 지나 천 리를 넘어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한원翰苑》

사료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죽령’은 남옥저 ~ 숙신와의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계림(길림)과 가까운 지역입니다.

그런데 신라본기 기록을 보면 북쪽 변경이 하슬라(何瑟羅) 인데, 그 속현이 ‘죽령‘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四十二年, 秋七月, 北邊何瑟羅旱·蝗, 年荒民飢. 曲赦囚徒, 復一年租調.

42년(397) 가을 7월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何瑟羅)​에 가뭄과 누리의 피해가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렸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

何瑟羅州 一云河西良, 一云河西.. 乃買縣, 東吐縣, 支山縣, 穴山縣, 䢘城郡 一云加阿忽., 僧山縣 … 竹峴縣

하슬라주(何瑟羅州)에 보면 죽현현(竹峴縣)이 속해 있으며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잡지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竹嶺縣, 本髙句麗竹峴縣, 景徳王改名. 今未詳.

죽령현(竹嶺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죽현현(竹峴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즉 정리해 보면 하슬라의 속현이 죽현현인데 그 원래 이름이 죽령(竹嶺)이며 그곳이 신라의 북쪽 경계입니다.

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고구려의 왕이 말하기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 第五 선덕왕善德王》

삼국사기의 동천왕(東川王)의 퇴각로와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의 사료의 내용은 정확히 일치하며 이 경로를 통해 김씨들이 길림(계림)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요동에서 관구검에 밀려 길림(吉林) 지역 까지 이동했다고 생각할수 있는 데, 신(新)나라 멸망 후 그들이 요동(遼東)으로 이동 했다는 내용이 ‘대당고김씨부인묘비’에서도 정확히 나옵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휴도왕과 김일제

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漢不見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

한(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위나라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에 쳐들온 시기는 246년입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12대 왕인 첨해이사금((沾解泥師今,재위 : 247~261)으로 석씨 왕조입니다. 실제로 김씨가 최초로 왕이된 것으로 정착기를 감안하며 13대 미추이사금(味鄒泥師今, 재위 : 262~284)로 시기가 정확히 일지합니다. 그리고 15대 기림 이사금(基臨 泥師今, 재위 : 298 ~ 310년, 재위) 시기에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정합니다.

十年, 復國号 新羅.

10년(307)에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新羅)’로 하였다.

《신라본기 제2 기림(基臨) 이사금(尼師今)》

이런 내용들을 보면 신라(新羅)라는 명칭이 신(新)나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선조가 김일제(金日磾)이며 계림(鷄林)이 즉 길림(吉林)이라는 만주원류고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이것이 신라(新羅)의 국호가 생긴 배경이며 신나라 멸망 후 김일제의 후손  김씨 세력이 요동(遼東)에서 계림(鷄林:길림)으로  이동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후기에서도 한번 이동이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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